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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암스님 원고 58-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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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행 스님 작성일20-01-29 16:31 조회1,91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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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 한암(漢岩) 스님의 법맥(法脈)

 

한암(漢岩) 스님 밑에는 탄허 스님이나 난암 스님, 보문 스님처럼 훌륭한 법제자도 계시지만 스님을 곁에서 모시고 함께 생활하며 공부했던 많은 스님들도 계십니다. 한암(漢岩) 스님과 불연이 닿았던 스님들은 한결같은 존경과 그리움으로 한암(漢岩) 스님을 회상합니다. 

 

‘서릿발처럼 엄하면서도 자비로웠던 스님(범룡 스님)’, ‘인과를 철저히 알고 사리에 밝았던 스님(도원 스님)’, ‘사리에 밝으신, 전무후무한 스님(보경 스님)’, ‘선지식이고, 도인입니다(화산 스님)’, ‘우리가 본받아야 할 한암(漢岩) 스님의 중노릇(도견 스님)’, ‘근검절약에 철저하셨던 분(설산 스님)’, ‘생불이었던 한암(漢岩) 스님(천운 스님), ’선견지명에 밝았던 스님(동성 스님), 큰일과 대의명분을 위해서 자신을 희생시키는 분(현해 스님), 참선, 간경, 염불, 의식, 가람수호를 승가 5칙으로 삼으신 분(혜거 스님),  철저하고 무섭게 수행하신 스님(무여 스님), ‘계정혜 삼학을 실천하신 큰스님(봉석 스님)’, ‘시주 은혜를 잊지 말라고 강조하신 스님(창조 스님)’, ‘적게 먹고, 강력하게 정진해야 한다(뇌묵 스님)’, ‘한암(漢岩) 스님은 도인입니다(경희 스님)’, ‘대중화합을 으뜸으로 삼으신 스님(진관 스님)’, 도인이면서도 자비로운 모습(법련 스님), ‘철저한 수행자인 율사 (덕수 스님)’…. 

 

현생에서 스치듯 지나가는 인연도 전생에 몇 억 겁의 세월 동안 쌓아온 인연이라고 합니다. 어떤 인연이든 그 줄기에는 뿌리가 있습니다. 지금 강남 봉은사 주지로 계신 원명(元明) 스님도 월정사와 인연이 깊습니다. 14살의 어린 나이에 1975년 월정사에서 능혜(能慧) 스님을 은사로 동진 출가한 원명 스님은 1977년 월정사에서 탄허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79년 범어사에서 고암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했습니다.

 

원명 스님은 범어사 승가대학을 거쳐 용주사 중앙 선원, 불국사 선원, 마곡사 태화 선원, 고불총림 선원, 칠불사 운상 선원, 법주사 총지 선원, 봉암사 태고 선원, 상원사 청량 선원 등에서 안거 수행했으며, 오대산 북대에서 정진 중이던 2000년 말, 당시 상원사 주지 정념(현 월정사 주지) 스님과 문중 스님들의 권유로 삼화사 주지의 중책을 맡습니다. 가난한 재정에, 초라하기 그지없던 천년고찰 삼화사를 2004년 조계종 포교원이 선정한 신도 등록 최우수 사찰로 도량의 면모를 일신하셨고, 이후 조계사 주지와 총무원 호법부장을 거쳐 2015년 대한불교 조계종 봉은사 제26대 주지에 취임합니다. 

 

원명 스님의 은사이신 능혜 스님(能慧, 1938~2008)은 1958년 부산 금정사에서 경월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셨습니다. 1959년 동산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7년 석암 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고, 1964년 해인총림 안거 이래 20안거를 성만(盛滿)하셨습니다. 조계종 재무부장과 다섯 차례의 중앙종회 의원, 평창 상원사 주지 등을 역임하셨고, 삼화사 주지로 입적하셨습니다.

 

능혜 스님의 은사 스님은 경월 스님이며, 경월 스님의 은사 스님은 한암(漢岩) 스님께 수계를 받고 스님의 상좌를 지낸 묵암 스님입니다. 묵암 스님의 자취는 태백산 망경사(望鏡寺)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망경사라고 부르는 이 사찰은 ‘망경대(望鏡臺)’라고 하는 게 맞습니다. 함백산 석남원(정암사)에 머물던 자장율사께서 어느 날 문수보살이 태백산 봉우리(지금의 문수봉)에 석상으로 화현한 것을 보고 천제단이 있는 지금의 영봉(靈峰) 아래 사찰을 짓고 망경대라고 칭하셨습니다. 하지만 망경대 역시 6.25 전쟁의 화마를 피하지 못한 채 모두 불에 타 없어졌는데, 묵암 스님께서 1955년 지금의 망경대를 중창하셨습니다. 

 

망경대에는 조선 단종 임금을 산신령으로 모시는 단종 비각(端宗碑閣)이 있습니다. 비각의 현판(懸板)과 「조선국 태백산 단종대왕 지비(朝鮮國太白山端宗大王之碑)」라는 비문(碑文)의 글씨는 탄허 스님의 친필입니다. 매년 음력 9월 3일에 단종 임금의 영혼을 위로하고 추모하는 제를 지냅니다. 이 모두가 한암(漢岩) 스님으로부터 시작된 아름다운 인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암(漢岩) 스님께 수계를 받은 비구니 스님 중에는 인홍(仁弘, 1908~1997) 스님, 묘공 대행(妙空大行, 1927~2012) 스님처럼 불교계에 큰 족적을 남기신 스님도 계십니다. 

 

인홍(仁弘) 스님은 34세인 1941년 오대산 월정사 지장암으로 출가, 정자(淨慈)스님을 은사로 수계 득도(得度) 후 1942년 오대산 상원사에서 한암(漢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1943년 일운(一雲) 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1945년 서울 선학원에서 동산(東山)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으셨습니다. 

 

1951년 성주사 결사를 통해서 ‘부처님 법대로 살자’라는 결사 정신을 실천하면서 비구니 승가의 출가정신을 회복시키고, 종단 정화에 참여해 한국불교 청정 승가의 확립에 헌신하셨습니다. 1957년에 울산 석남사 주지로 취임하여 선원을 열고 대중과 함께 수행 정진하면서 퇴락한 가람을 일으켜 세우고 300여 명의 은제자를 기르는 일에 혼신의 힘을 쏟으셨습니다.

 

 ‘가지산의 호랑이’, ‘비구니의 대모’라고 불리는 근현대 한국 비구니 역사의 산증인이신 인홍 스님의 열반송(涅槃頌)에서 무애(無碍)한 경지가 느껴집니다. 

 

삼세 불조 가신 길을 나도 가야지.

미수(米壽) 생애 사바의 길 환몽 아님 없도다.

일엽편주처럼 두둥실 떠나가는 곳

공중에 둥근 달 밝을 뿐이네.

 

 

대행(大行) 스님은 1950년 한암(漢岩) 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0년 탄허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1961년 비구니계를 수지했습니다. 치악산 상원사 근처에 있는 토굴에 머물면서 찾아오는 많은 사람들의 고통스러운 호소를 듣고 그들을 도왔으며, 1963년 상원사 중창 불사를 도맡아 상원사의 면모를 일신하는 데 헌신했습니다. 1971년 경기도 안양시 석수동에 대한불교 조계종 한마음선원(전 대한 불교회관)을 세우고, 1982년 조계종 제1교구 직할 사암으로 등록한 후 선원장으로 취임하여 30여 년 동안 충청북도 음성군 금왕읍 무극리에 첫 국내 지원을 시작으로 15개의 국내 지원을 개원하고 독일, 미국, 아르헨티나, 태국, 캐나다 등 다섯 개 나라에 10개의 해외 지원을 개원하며 불법을 전합니다. 

 

이와 함께 불교 대중화를 위해 국내 최초의 영탑공원 조성, 한글 뜻풀이 경전의 보급, 법문의 영상 매체화, 한국 불교 사상 최초의 인터넷 포교, 선법가를 통한 음성 포교, 현대불교 신문 창간, 한마음 과학원 설립 등 실천적이고 현대적인 다양한 포교 방편을 실천하셨습니다. 

 

오대산문의 법통(法統)에 뿌리를 두고, 우리나라의 불교 발전에 크게 기여하신 비구니 스님들이 많이 계십니다. 퇴계 이황 선생의 15대 종손녀인 오산 성법 스님(五山 性法, 1929~) 스님도 그중 한 분입니다. 6.25 전쟁으로 가족을 잃는 아픔 속에서도 의과대학 진학을 꿈꿨으나 할아버지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1953년 오대산 지장암으로 입산하여 비구니 본견(本堅) 스님을 은사로 득도한 성법 스님은 같은 해 월정사에서 자운(慈雲, 1911~1992) 율사로부터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55년 경남 동래 범어사에서 동산 혜일(東山 慧日, 1890~1965) 선사로부터 비구니계를 수지했습니다. 동산 선사는 1914년부터 2년간 한암(漢岩) 스님 밑에서 사교(四敎)를 배운 인연이 있는 분입니다. 

 

성법 스님은 1966년 건국대학교 동양철학과를 이수하고, 1968년 중화민국 문화대학 동양철학과 졸업, 2000년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사회복지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1966년 한중문화 교류 한국 대표를 시작으로 전 세계 평화국제회의, 한ㆍ일 불교 학술회의, 세계 불교도우의회 등에 한국 대표로 참석했고 일본, 스리랑카, 인도 등 국제 교류에도 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활발한 저술 활동을 통해 『불보살의 본적』, 『불교에서 본 미래의 인생관』, 『목련존자와 청제 부인』, 『대승기신론 강화』,『불설 42장경』, 『한국불교 전교사』, 『불정존승다라니경』 등 10여 종의 불교 서적을 저술하거나 번역하여 대중들이 쉽게 부처님의 가르침에 다가갈 수 있도록 했습니다. 

 

경북 금릉군 직지사, 상주군 남장사 관음선원, 경주시 법장사 포교당, 김천시 관음사, 대한불교 조계종 국제포교사, 서울 묘관음원, 남한산성 망월사(望月寺) 등에서 노전과 주지 등을 두루 역임하면서 여러 사찰을 중수ㆍ복원ㆍ창건하셨습니다. 

 

1990년에 복원 중창된 남한산성 망월사는 1981년 인도에서 기증받은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기 위해 성법 스님이 증조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정리해서 복원 중창 불사한 비구니의 수도 도량입니다.

조선시대 탄압받던 불교의 부흥의 시발점으로 알려진 망월사(경기도 지정 기념물 제111호)는 1624년부터 2년에 걸쳐 축성된 남한산성 내 아홉 개 사찰 중에서 가장 오래된 절입니다. 본래 산성 내에는 옥정사와 망월사 2개의 사찰만 있었으나, 산성 축조에 동원된 승려들의 숙식과 훈련 장소를 확보하기 위해 한흥사와 장경사ㆍ천주사ㆍ국청사ㆍ개원사ㆍ남단사ㆍ동림사 등 7개의 사찰을 더 지었습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의병들의 본거지로 사용됐다는 죄목으로 이 사찰들은 일제에 의해 모두 파괴되고 맙니다. 광복 후 망월사와 장경사ㆍ국청사ㆍ개원사가 복원되어 오늘에 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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