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군 의병활동
페이지 정보
작성자 원행 스님 작성일19-02-28 10:16 조회3,584회 댓글0건본문
『 의병활동과 3·1운동 』
한말의 의병활동은 두 단계로 발전했다. 첫 단계가 일본제국의 명성왕후 시해사건과 단발령을 계기로 일어난 1895년도의 을미의병이며, 두 번째 단계는 1905년 을사보호조약이 계기가 되어 본격적으로 일어났다.
을사의병은 을미을병과는 달리 국권 침탈에 대한 저항의 성격이 강해 조선이 독립 국가로써 대우 받아야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차원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중에 1919년 일제가 고종 황제를 독살 했다는 소문이 전국적으로 알려지면서 일본에 대한 적개심에 불타 3·1 운동이 촉발 되었으며 전 민족적인 항일운동으로 전개되었다.
▣ 평창군의 의병활동가와 3·1운동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의병활동
· 이성덕(李聖德) 1888 ~ 1909. 12
평창사람이다. 일제의 화폐 개혁과 정미 7조약에 분개하여 이 땅에서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 1909년 5월 동지를 규합. 소규모의 의진을 편성 후 의병장이 되어 거의 하였다.
평창군 미탄면장 박성현에게 군자금을 징수하고 5월 20일 대화면장 김연량에게 군수품을 징발 하였다. 6월에는 일본군 수비대의 밀정인 심춘백을 처단, 응징 하였으며 평창군과 정선군의 경계인 성마령에서 헌병군조 판본구남 (板本龜楠) 일행을 기습 공격 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추격을 받고 체포되어 1909년 12월 1일 교수형이 확정됨으로써 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 이원하(李元厦) 미상 ~ 1896
평창사람이다. 유인석 의진에 중군장으로 참여하여 평창지역 민병을 모집하는 역할을 맡아 민병장으로 활동하면서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1896년 2월 10일(음) 일병을 끌어들여 의병을 저지 하려한 평창현감 엄문환을 생포하여 2월 15일 효수하게 하였고, 동년 2월 18일부터 의진의 중군아장이 되어 원주지역 일대를 방어하였으며 동년 5월4일 원주와 제천 등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치루었고 동년 5월 24일 중군랑에 임명되어 제천 의병을 지휘하였다. 이와 같은 활동 중 일본군에 포위되어 총살 순국하였다.
◦3·1운동
평창군 지역의 3·1운동은 천도교 횡성교주 김인경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전달 받은 대화면 운교리의 이인영이 3월 16일 경 대화리에 거주하는 최상달에게 2매를 전달하면서 시위가 추진되었다. 최상달은 정선군 동면 화암리 손호국의 집에서 동면 석곡리에 거주하는 최돈상에게 선언서를 교부하고 독립 만세운동을 권고하였다. 또한 평창면 하일에 거주하는 유학가 이승로는 같은 마을 이종하와 함께 천도교인과 유학자에 의하여 추진되던 시위 계획을 통합하기로 하고 3월 21일 평창면 원당리 유영목의 집에서 천도교인 손상봉(원당리 거주) 김흥지 운교리 김흥주 등과 함께 회합하였다. 이 자리에서 4월 4일 대화 장날과 5일 평창 장날에 독립만세운동을 부르며 시위하기로 결의 하였다.
손상봉은 최태제 오정천 등을 설득하고 4월 3일에는 이종하 이승로와 함께 만세운동에 필요한 태극기를 만들었다. 운교리의 김희국도 평창과 대화에서 조직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이종하가 평창주민을 선동하다가 체포되어 시위는 실패하였다.
당시 도암면의 만세운동은 성공하여 4월 7일 약 130여명이 횡계리에서 만세 시위를 거행하였다.
횡계리에서 집결하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한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며 차항리 쪽으로 행진하였다.
3·1운동 이후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정부 산하 대한독립애국단 강원도단에 많은 애국지사들이 집결하였는데 평창 중리 이기헌, 이근세, 조두환, 고제락 등이 애국단 설립을 위한 자금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창일계라는 이름으로 계를 모집하여 우필규 등 17명을 권유하여 13구좌 10원씩 313구좌 출금을 약속 받았다.
◦불교 출신 운동가
· 이종욱(李鍾郁) 1884 ~ 1969
평창출신이다. 호는 지암으로 일찍이 불교에 귀의하여 월정사 승려로 있었다. 1919년 3·1 운동에 가담하여 활동하였으며 4월 2일에는 인천 만국공원에서 비밀리에 각 종교계 대표들과 독립지사들이 모여 국민 대회를 열었는데, 이 때 불교계의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 해 4월 초 상해로 건너가 상해 임시 정부에 참여 하였으며 대한 적십자회 조직에 참여한 뒤 임시정부 국내 특파원으로 서울에 파견되었다. 그는 안재홍, 송세호, 연병호 등과 청년 외교단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으는 등의 활동을 벌였으며 이들의 건의서를 임시정부 국무총리 안창호에게 전달하기도 하였다.
공적에 비하여 국민포장이나 훈장 등이 추서되지 않은 것은 친일 행적 때문이라고 전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