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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환수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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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0-03-13 10:08 조회2,672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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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사고본 조선왕조실록과 의궤 환수과정 


2004년 교토의 고서점에서 발견한 ‘청구사초’를 통해서 1927년 경성대학으로 반납된 《조선왕조실록》 외에 도쿄대학이 남은 《조선왕조실록》을 소장하고 있는 것을 확인하여 처음으로 《조선왕조실록》의 환수운동이 막을 올렸다. 

 2년동안 과거 두차례에 걸쳐 도쿄대학에서 실록을 직접 조사했던 배현숙 교수를 통하여 구체적인 사실관계를 확인하였고 이를 환수 받기 위하여 2006년 1월 중순에 봉선사에서 처음으로 환수를 목표로 하는 모임을 열었다. 이후 월정사의 주지스님이 재정적 지원을 포함한 동참을 선언하면서 봉선사와 월정사 주지스님 두분을 공동위원장으로 하는 ‘조선왕조실록환수위’가 같은 해 3.3일에 정식으로 출범하였다. 그리고 그동안의 자료조사들을 토대로 도쿄대학에 정식으로 요구사항을 전달하게 되었고 5월 30일에 도쿄대학은 원산국 반환을 결정하는 발표를 하게 되어 《조선왕조실록》은 7월 7일에 서울대 규장각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9월 14일, 일본대사관에 ‘반환요청서’를 공식적으로 전달하면서 2002년 천혜봉 교수의 ‘한국해외전적조사연구회’의 조사를 통해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것이 확인된 《조선왕실의궤》의 환수운동을 위한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실록의 경우와 달리 의궤들의 환수를 위한 과정은 훨씬 더 험난했다. 실록의 경우 국보로 지정된 대한민국의 대표 문화재라 할 수 있었으나 의궤의 경우는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하기 그지없는 문화재여서 ‘문화재적 가치’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이 매우 부족했다. 이는 결국 실록환수때와 같은 대대적인 대중의 지지를 이끌어내기가 힘든 상황임을 암시했다.

 관리의 주체도 달랐다. 실록의 경우는 도쿄대학이 더 이상 국립대학이 아닌, 독립된 법인으로 실록에 관하여 단독적인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의궤가 있는 곳은 천황궁에 소속된 궁내청, 필연적으로 일본의 정부가 직접적으로 결정권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2006년 10월 6일에 일본 궁내청의 허가로 궁내청에 있는 것으로 확인된 72종 141책 중 12종 20책을 열람하였다. 그리고 11월에 프랑스 파리의 유네스코 본부를 방문하여 의궤의 반환에 대한 여러 가지 자문을 구하였으며 이를 통해 12월 8일 제 17대 국회에서 일본이 약탈해 간 《조선왕실의궤》의 즉각 반환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민주당의 손봉숙 의원의 발의로 상정되었고 이 초안을 혜문스님 본인이 직접 작성하셨다. 이를 통하여 국민의 관심을 기대했으나 국내의 언론 중 한겨레신문을 제외한 어느 언론에서도 이를 보도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가 바뀌어 2007년이 되어서 북한의 ‘조선불교도연맹’이 살무회담 개최를 제의해 왔다. 이들은 이전 실록의 환수 때도 함께 활동해왔으며 이것은 1965년의 한일협정으로 인해 많은 제약을 가진 한국의 상황에서 큰 도움을 주었다. 2월 8일에 첫 회의를 열어 향후의 일정을 논의하였으며 3월 23일에는 환수를 위한 합의서에 서명하기 이르렀다. 

 북한과의 협의 후 환수위는 2007년 5월 8일에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일본황실과 정부를 피신청인으로 하는 ‘민사조정신청서’를 접수하였다. 이는 단순한 시민운동적 차원만이 아닌, 법리적인 측면으로 고려한 것으로 동시에 한일협정의 한계를 넘은 민간차원의 청구는 가능한 것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결의안 채택과 조정신청 이후 일본의 여러 지식인들과 언론에 이를 홍보하는 일을 진행하였다. 6월 초순, 일본의 ‘아카하타’신문에서 ‘《조선왕실의궤》 환수’ 문제를 대정부 질의에 올린다는 기사가 나왔다. 이것은 앞서 국회결의안을 알게된 일본의 공산당 의원들이 중의원 문부위원회, 참의원 외교방위위원회에서 각각 문부대신과 외무대신에게 질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오가타 참의원 의원을 통해서 일본의 외무성과 면담 제의가 들어오면서 7월에 일본에서 회담이 성사되었다. 7월 17일에 이뤄진 이 회담에서 서로의 입장을 확인하고 의궤 반환에 희망을 가지는 자리가 되었다.

 이후 오가타 의원은 자신의 후임 의원이 될 가사이 아키라 중의원을 소개했으며 8월 13일에 본인들이 직접 궁내청에서 의궤를 직접 열람하였다고 했다. 그리고 이들은 8월 20일에 한국을 방문해 한국의 국회의원들(민주당 김원웅 의원, 손봉숙 의원, 한일의원연맹 간사 이화영 의원)과 논의를 하였고 21일 에는 오대산 월정사의 사고지까지 방문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 한나라당 김형오 의원, 민주당 이낙연 의원과의 개별 방문을 통해 현안문제 논의도 전달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양국의 정치권이 관심을 가지는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후 비록 주된 안건으로 언급되지는 못했으나 9월 3일에 열린 한일의원연맹의 서울총회에서 《조선왕실의궤》와 관련하여 사회문화분과의 안건으로 토론이 이뤄졌다. 이 자리에서 공산당뿐만 아니라 자민당과 민주당 의원들에게도 의궤에 대한 인식을 주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2주 뒤인 9월 20일에는 일본의 주요언론 중 하나인 아사히신문이 정식으로 ‘《조선왕실의궤》 환수운동’에 대하여 보도하였다. 그리고 이때부터 주일 대사관과 문화재청, 한국 정부까지 관망하는 자세를 버리며 본격적인 대책 상의를 시작하였으며 그 첫 단계로 환수위원회는 정부로부터 경비의 일부를 보조받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0월 15일에 이뤄진 2차 면담을 통하여 환수의 가능성은 점점 더 현실화 되어갔다. 

 그리고 11월 들어 외무성의 부대신 기쿠라 히토시와의 만남을 통해 이러한 가능성은 점점 더 높아갔으며 11월 28일,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반대하는 운동을 펼쳐오던 일조협회가 공식적인 진정서를 후쿠다 총리에게 제출하면서 또한번의 움직임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2008년 1월에 가사이 의원이 한국을 찾아 관심을 보여주기를 희망하였으나 이후 2월 25일 치러진 이명박 대통령의 취임식과 함께 열린 회담에서 이 문제는 확답을 받지 못하여 원론적인 입장만 피력하였을 뿐 의궤 환수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은 이뤄지지 못하였다. 또한 이명박 대통령의 방일로 이뤄진 4월 21일의 회담에서도 《조선왕실의궤》는 논의되지 못하였다.


 《조선왕실의궤》의 환수문제는 이후 북한과의 협동으로 다시금 시동이 걸리기 시작하였다. 2008년 8월 5일부터 9일까지의 평양방문을 통하여 남북의 불교계는 서로 힘을 연대할 것을 합의 하였으며 이를 통해 남북이 함께 일본 총리에게 반환을 요구하는 요청서를 제출하기 위한 절차에 들어갔다. 이를 위해 일본에서 오찬을 함께 하기로 합의하여 환수위의 활동에 동참하는 일본의 의원들을 초청하는 절차를 진행하였으나 9월2일 갑작스런 후쿠다 총리의 사퇴로 진행에 어려움을 겪었으나 다행이 9월 4일에 일본 내각부의 조사역인 야마다 씨에게 남북 공동의 반환 요청서를 제출하였다. 

 귀국 후 환수위는 지방자치단체들과의 협력을 통한 운동을 전개해나간다. 그중 의궤와 깊은연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 서울시, 구리시, 남양주시, 평창군 등 네 곳의 지방 자치단체에 결의안 채택을 요청하였다. 10월 31일에 서울시가 부두완 한나라당 의원의 발의로 12월 19일에 결의안을 채택하였고 구리시는 2009년 6월 조선 왕릉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과 같은 시기에 권봉수 의원의 발의 후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2009년 9월에는 남양주시도 결의문을 채택하여 일본 궁내청에 송부했으나 오대산사고의 소재지였던 평창군의회의 경우는 결의안 채택이 실패로 돌아가 아쉬움을 남겼다.


 2010년 1월 15일 혜문스님은 아사히신문의 한국 특파원들과 약 두 시간 반에 걸쳐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이는 경술국치 100년을 맞아 한일관계의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아사히신문의 특집이었다. 그리고 이 보도와 더불어 2월 25일에는 18대 국회에서 국회 본회의에서 ‘일본 소장 조선왕조의 의궤 환수 촉구결의안’이 당시 재석의원 전원의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특히 3.1절을 앞둔 시점에서의 이 결의안 채택은 KBS에서 <일요진단>, <한국의 유산> 등의 프로그램에서 의궤환수운동이 대대적으로 언론을 타계되는 계기가 되었다. 

 방송만이 아니라 중앙일보 역시 이 문제를 1면의 머리기사로 다루며 대대적으로 알리기 시작하였으며 한나라당은 대변인을 통해 논평을 발표하고 사무총장인 정병국 의원은 환수를 위한 특위를 제안하였다. 이러한 흐름을 타고 4월 외무성 방문을 통해 의궤 환수가 거의 끝에 다다름을 느꼈으며 5월에 열린 한일 외무장관회담에서 일본 오카타 외무대신이 직접적으로 의궤환수에 대한 한국의 기대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언급한데 이어 7월에 일본 관방장관 센고쿠 요시토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면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을 해결해 가겠다’는 말을 기자회견에서 공식적으로 언급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정치권의 움직임들 속에 환수위는 7월 23일, 마지막 진정서를 당시 신임 총리였던 간 나오토 총리에게 제출하였으며 8월에 이르러서는 일본의 여러 국회의원들과 직접적인 면담을 가지며 협력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8월 10일, 결국 일본 총리는 ‘식민지애 사과와 의궤 등 도서 반환’이 명시된 담화를 발표, 같은 해 11월 APEC 정상회의에서 양국 정상이 도서반환 협정에 서명함으로서  《조선왕실의궤》를 돌려받기 위한 4년간의 긴 운동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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