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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꺼내 드는 ‘충효(忠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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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2-07-16 14:41 조회90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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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효(忠孝). 참으로 고리짝 얘기다. 이젠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지 않나 싶다. 독재, 권위, 억압, 지배 이데올로기, 가부장, 꼰대 같은 부정적인 느낌마저 풍긴다.

 

하지만, 충효는 인류사 수천 년 동안 사라지지 않고 이어 내려온 사상이자 규범이다. 구시대 유물로 묻히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건 그만큼 인간과 그 인간이 어울려 사는 사회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는 뜻이다. 다만, 잘못 이해하고 강요했을 뿐이다.

 

잘 알다시피 충효는 유교 사상, 특히 공자(公子)의 핵심 실천 덕목이다. 유교에서는 부모의 마음을 받드는 효(養心志之孝), 부모의 몸과 입을 잘 받드는 효(養口志之孝) 이 두 가지를 완전히 해야 참 효자라고 한다. 공자의 3천 제자 가운데 이 두 가지 효를 다 잘한 이가 증자(曾子)와 민자건(閔子騫)이다. 이 둘의 효심과 관련한 일화는 후학들에게 큰 귀감이 되었다. 특히 증자는 공자와 나눈 문답 가운데 효와 관련한 부분만 추려 기록한 효경(孝經)을 펴냈을 정도로 대표적인 효 사상가였다.

 

하지만, 맹자(孟子)는 생각이 달랐다. 맹자는 평하기를 부모 섬기는 것이 증자 같은 이는 어지간하지 장하지는 않다(孟子評曰 事親 若曾子者 可也)’라고 했다. 왜냐하면, ()을 겸하지 못한 효이기 때문이다. 충을 겸한 효라야만 대효(大孝), 지효(至孝), 달효(達孝)라고 한다. 이것이 유교에서 말하는 충효일치(忠孝一致). 적어도 삼천리강산을 자신의 한 가정으로 보고, 5천만 대중을 자신의 한 가족으로 봐야만 진짜 효에 이르게 된다는 뜻이다. 넓게 보면 지구 전체가 한 가정이자 한 가족이다.

 

충효를 요즘 말로 바꾸면 공감과 배려, 그리고 사회적 연대. 부모에게 하듯이 모든 이웃에게 자비심을 낸다면 그것이 곧 공감과 배려이고 그 효심(孝心)’이 사회 전체로 확장되면 바로 사회적 연대라 할 수 있다. 뜬금없이 케케묵은 충효 이야기를 꺼낸 까닭이다.

 

현대사회의 흐름이 그렇다고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지극히 개인적이다. 아니, ‘개인적을 넘어 이기적이다. 파괴적이기까지 하다. 이로 인한 해악은 따로 소개하지 않아도 될 만큼 차고도 넘친다.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인간성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예()와 인()은 거추장스러운 낡은 옷이 돼버렸다. 그것이 개인, 조직, 정치세력 간의 극한 대립으로 번지고 결국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고 있다.

 

바로 옆집 이웃의 죽음을 몇 달이 지나도 모른다. 상대의 허물을 들춰야 내가 올라간다. 저쪽 편을 짓밟아야 우리가 이긴다. 진실인지 아닌지는 상관없다. 사회와 국가의 미래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도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눈앞의 내 이익에만 몰두한다. 이 끔찍한 사회가 지금 우리가 사는 사회가 아니라고 그 누구도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사회에 공감과 배려’ ‘사회적 연대는 발붙이기 힘들다. 한 마디로 충효가 사라진 시대다.

 

공자 이후 유교 사상은 진보했다. 맹자는 권력자는 백성을 위해 정치해야 하고, 백성은 부당한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자에게 저항해야 한다라거나 사람은 사람다움을 지키기 위해 마땅히 애써야 한다라는 인의(仁義) 사상을, 묵자(墨子)남에게 차별 없는 사랑을 베풀어야 혼란한 사회가 안정될 것이며, 이러한 사랑은 실제로 서로에게 이익이 되어야 한다라는 교상리(交相利) 사상을 설파했다. 모두 공자의 충효 사상을 발전시킨 것이다.

 

()의 또 다른 뜻은 참마음이고 효()의 또 다른 뜻은 상복(喪服)’이다. 우리의 참마음이 상복을 입은 것 같아 산중에 앉아있는 소승의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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