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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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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3-07-09 14:49 조회4,3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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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전쟁

1) 반봉건 반침략의 행동과정

1894년 3월에 전봉준 등 지도부는 고부봉기에 이어 무장에서 정식으로 선전포고하였다. 전라도 각지에서 모여든 농민군들은 백산에서 총집결하여 부서를 결정하고 항전을 다짐하였다. 동학농민군들은 규율을 엄히 하고 민심을 끌어들이려 하였는데 실제로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농민봉기 첫 단계에는 고부 관아를 다시 점령하고 황토현에서 전라감영군을 쳐 부셨다. 그러자 중앙에서는 장위영군 800명을 파견하였는데 이들 군사들은 서울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고을을 휩쓸며 횡포를 부렸다. 농민군들은 중앙군을 유인하여 장성에서 관군 선발대를 격파하였다. 이어 4월 27일 전라감영을 점령하였다.

전라감영을 차지한 농민군들은 중앙군 사령관인 홍계훈과 협약을 맺었다. 홍계훈은 폐정을 중앙에 보고하여 시정하겠다고 약속하였다. 이를 오지영의 <동학사>에서는 12개 폐정 개혁을 약속하였다고 하나 신분제도·토지제도 개혁과 여러 정황으로 보아 12개조를 구체적으로 실행하겠다고 약속하였다기보다 당시 농민들의 여러 요구조건을 뭉뚱그려 적어 놓은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농민군은 일단 후퇴하여 각지에 집강소를 차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폐정의 개혁에 나섰다.

1차 봉기는 전라도 농민군들이 주도하였고 충청도와 경상도의 농민군들이 측면에서 호응하였다. 집강소기간에도 이런 구도와 비슷하게 전개되었다. 전쟁의 중심권이 아니었던 충청도의 서쪽해안지대와 경상도의 남쪽지대에서도 별도로 봉기하여 소규모의 집강소활동을 전개하였다. 집강소는 위에서 살펴본 대로 농민통치기구였고 집강소활동은 반봉건운동이었다.

2차 봉기는 반침략 전쟁이었다. 민씨 정권은 농민봉기가 일어나자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였으며 이에 일본군도 톈진조약의 약조에 따라 군대를 파견하였다. 일본군은 6월 21일 불법으로 경복궁을 점령하여 고종을 유폐하는 등 주권을 유린한 뒤에 군사 지휘권을 거머쥐었다. 그래서 나라는 반식민지 상태로 접어들었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을 유발하였다. 청일전쟁이 경기도 평안도에서 전개될 때인 7월 무렵에 농민봉기는 산발적이기는 하나 경상도, 경기도, 강원도로 확산되었다.

이 해 9월 전봉준 등은 전라도 농민군에게 동원령을 내려 접경지대인 삼례로 모이게 하였다. 전봉준은 무기 등 준비를 갖추고 또 추수기를 기다렷다가 이때에 일본과 정면 승부를 겨루려고 모든 농민군을 집결케 하였던 것이다. 전봉준은 삼례에 전라도 창의대중소(倡義大衆所)를 두었다.

삼례에 많은 농민군들이 모여들었다. 전봉준은 여기에서 머물면서 김개남 등 농민군 지도자들에게 호응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늦가을의 추위에 대비하여 짚신을 만들고 옷을 짓게 하였으며 양곡을 비축하고 대나무로 죽창을 만들었으며 전라감사 김학진의 협조로 위봉산의 무기를 거두어들였다. 한편 충청도에 전령을 띄워 양곡과 짚신 연초 등을 준비해두라고 요청도 하였다. 흥선대원군과 연계를 모색하였고 북접의 호응을 요구하는 밀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전봉준은 마침내 북접의 호응을 얻었다.

교단 지도자들은 관군들이 계속 동학교도들을 탄압하고 일본군의 침략행위가 더욱 정도를 더해가고 전국의 교도들이 봉기 명령을 내려달라는 빗발치는 재촉을 받았다. 그동안 최시형은 신중하게 정세를 관망하며 때를 기다렸다. 이때 교단 지도부에서도 전면적 봉기를 주장하였다. 최시형은 마침내 “앉아서 죽겠는가?”라고 분연히 외치고 전국에 대동원령을 내렸다.

최시형의 대동원령은 강원도, 경상도, 황해도 등지의 농민군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냈다. 그리고 농민전쟁을 전국적 규모로 확산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그동안 이들 지역 동학교도들은 대접소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 때 모인 농민군이 10만 명이라고도 한다. 북접 농민군들은 손병희 지휘아래 논산으로 집결하였다. 하지만 일본군은 다른 지역의 농민군이 논산, 공주로 합류하는 길을 완전 통제하였다. 그런 탓으로 경상도, 강원도, 황해도, 경기도 그리고 충청도 해안지대의 농민군은 오던 길로 뒤돌아 갔다.

전봉준은 북접의 연합전선 동의에 고무되어 직속부대 4천명을 이끌고 여산, 강경을 거쳐 은진, 논산으로 북상하였다. 충청북도와 전라도의 농민군이 주축이 된 두 세력은 논산에서 만나 굳게 손을 잡고 이유상 등 현지 농민군들과 함께 노성, 공주로 진격하였다. 이 무렵에는 청산, 논산-삼례, 논산의 주력전선 이외의 지역에서 지역성을 띠고 곳곳에서 봉기하였다.

공주에서 농민군 연합부대와 관군 일본군 연합부대는 처절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20일쯤 대치하거나 전투를 벌였는데 농민군들은 폭설이 내리고 추운 날씨인데도 솜옷을 입지 못하고 맨발로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관군 일선 지휘자는 저 몇 만 명의 비류들이 4-50리에 뻗쳐 포위해 왔다고 전제하고 그 정경을 이렇게 적었다.

길이 있으면 빼앗고 높은 봉우리를 다투어 차지하였다. 동쪽에서 소리치면 서쪽에서 달려가고 왼쪽에서 번쩍이다가 오른쪽에서 튀어나와 깃발을 휘두르고 북을 울리면서 죽음을 무릅쓰고 먼저 올라 왔다. 저네들은 무슨 의리이며 저네들은 무슨 담력인가? 그들의 행동을 말하고 생각하니 뼈가 떨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공산초비기)

동학농민군은 11월 9일 우금재 전투에서 일본군의 대포와 기관총 따위 신무기 앞에 패배하고 말았다. 전봉준은 노성으로 후퇴하여 우리의 군사와 구실아치와 시민(장사꾼)에게 “나라를 위해 힘을 합하자”는 고시의 글을 피를 토하듯 띄웠다. 그 뒤 잔여 농민군들은 곳곳에서 전투를 벌이면서 뿔뿔이 흩어져 갔다.

우리 연구자들은 보통 1차 봉기는 반봉건, 2차 봉기는 반침략으로 그 성격을 구분하나 그 기본 흐름은 위에서 살펴본 대로 두 슬로건이 동시에 추구되었던 것이다. 그 당시 가장 척사운동을 열렬히 벌였던 양반 유생들은 농민군을 역적으로 몰면서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골방에 숨어 지냈다. 이들은 역사의 아이러니를 연출한 것이다.

2) 폐정개혁과 갑오개혁

전주에서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들과 관군의 현지 사령관인 홍계훈 사이에 1894년 5월 맺은 것으로 알려진 폐정개혁 12조가 있다. 그 <폐정개혁 12조항>을 보면 다음과 같다.(이 개혁안은 정식 조약이 아니라 집강소 활동의 중심 과제라고 보기도 한다.)

1. 도인과 정부 사이에는 묵은 혐의를 깡그리 쓸어버리고 여러 정사에 협력할 것

2. 탐관오리는 그 죄목을 조사하여 낱낱이 엄하게 징벌할 것

3. 횡포한 부호의 무리는 엄하게 징벌할 것

4. 불량한 유림과 양반 무리는 엄하게 징벌할 것

5. 노비문서는 불태워 없애버릴 것

6. 칠반천인(七般賤人, 일곱 종류의 천한 사람)의 대우는 개선하고 백정이 슨 평량립(平凉笠, 패랭이)은 벗길 것

7. 청춘과부에게는 개가를 허락할 것

8. 무명의 잡세는 일체 부과하지 말 것

9. 관리 채용은 지벌(地閥, 지역 연고)을 타파하고 인재를 등용할 것

10. 왜(倭, 일본)와 간통하는 자는 엄하게 징벌할 것

11. 공사의 채무를 가리지 말고 기왕의 것은 소멸시킬 것

12. 토지는 고르게 나누어 짓게 할 것(오지영 동학사에 수록)

여기에는 첫째 탐관오리, 횡포한 부호, 불량한 유림과 양반을 징벌한다는 것, 둘째 노비와 칠반천인과 백정의 신분차별을 없애거나 개선하는 것, 셋째 고른 인재등용, 넷째 청춘과부의 개가, 다섯째 무명잡세와 공사 채무의 해소, 여섯째 토지의 분작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이 개혁안은 전주화약의 조건이 될 수 없다. 일개 현지 사령관이 봉건제도의 골간인 신분과 토지문제를 결정할 사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홍계훈에 보낸 농민군의 요구사항은 국가정책의 비리와 농민의 과중한 부담을 개혁해달라는 항목으로 채워져있다. 그 화약의 조건을 이 요구조항에 맞추어야 할 것이다.

한편 오지영 <동학사>의 초고본에는 화약조건이라 하지 않고 집강소의 강령(綱領)이라 하였다. 다시 말해 집강소에서 농민군들이 개혁하려는 기본 항목이라는 뜻이다. 여기에는 토지 개혁까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6-7개월 진행된 집강소 활동으로 보아 토지문제는 손을 댈 기간이 아닐 것이다. 그런 탓으로 신분 타파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와 달리 이보다 2개월 정도로 늦게 7월에 공포된 갑오개혁에는, 문벌과 반상을 타파하고 인재를 뽑아 쓴다는 것, 부녀의 재가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자유에 맡긴다는 것, 공사 노비를 혁파하고 인신매매를 금지한다는 것, 역인, 재인, 백정을 모두 천인지위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것 등의 조항이 있었다. 그런데 농민군의 요구 사항인 조세, 부채, 토지, 무역 등은 일단 항목에 빠져 있었다. 그러니까 갑오개혁에는 농민군의 실천사항을 부분적으로 수용한 것이다.

3) 신분해방운동- 양반 상놈, 노비 백정을 없애자

앞에서 본 대로 봉건체제를 받치고 있던 신분문제가 풀어야 할 가장 중심의 당면 과제였다. 조선후기에 들어 신분에 다른 계급 사이의 갈등과 저항이 사회의 통합기능을 저해하였다. 어떤 방식이나 제도로든 풀어야 하였다.

갑오개혁이 공포되자 농민군들은 처음에는 확실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나 7월15일 남원대회에서 정식으로 논의되었고 전라감사 김학진과 관민상화책(官民相和策)을 약속한 뒤 실천항목이 되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도 알려지자 노비들은 크게 요동을 쳐서 상전에게 항의하면서 풀려나기도 하였고 일부는 먹고 살 재산을 나누어 달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일반천인과 백정들은 노비와 함께 민활하게 움직였다.

아무튼 천민들은 전봉준이 농민군을 이끌 초기 단계부터 활동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항쟁의 과정에서 전위역할을 하였다. 전주화해를 이룩한 뒤 집강소 활동을 벌였다. 집강소는 농민자치조직이 아니라 통치조직이라고 해야 정당한 풀이일 것이다. 바로 전라감사 김학진이 뒤로 물러나고 일선행정은 전봉준, 김개남 등 농민군 지도자들이 맡았고 군현 단위에서는 집강소 도소의 소임들이 수령을 골방에 들이 앉히고 구실아치를 부렸다.

집강소에서는 국가에 납입할 전세 군포 공물을 대신 받아 경비로 사용하였고 별도로 군수전 등을 거두어 2차 봉기의 군수물자를 마련하였다. 호남 집강소는 지역 단위로 설치했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인적 단위 또는 지역 단위로 설치해 제한적이나마 독자적 행정을 맡아 보았다.

집강소의 전위 행동대는 규율과 감독 그리고 경찰 역할을 맡은 성찰(省察)과 동몽(童蒙)이었다. 이들은 부정한 벼슬아치와 구실아치를 잡아 징치하기도 하였고 집강소의 규율을 어긴 자들을 감시하거나 적발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결혼 적령기인 양반집 딸을 찍어 강제로 혼인하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그래서 동몽군은 바로 중국 공산당의 전위조직인 ‘홍위병’에 비유될 만하였다.

한편 고창에서 농민군 지도자로 활동한 홍낙관은 천민으로만 구성된 농민군 부대를 거느렸다. 그 천인은 재인패를 중심으로 노비 백정을 말한다. 또 김개남포에도 노비와 백정을 중심으로 한 천민부대가 크게 활동하였는데 동몽군이 그 주역이었다. 그리하여 천민부대의 활동은 아주 강력했고 신분 차별의 타파에 앞장섰던 것이다.

오지영은 집강소에서 수행한 일을 두고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소위 부자 빈자라는 것과 양반 상놈, 상전 종놈, 적자 서자 따위 모든 차별적 명색은 그림자도 보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동학군의 별명을 지어 부르기를 나라에 역적이요, 유도에 난적이요, 부자에 강도요, 양반에게 원수라고 하는 것이며 심한 즉 양반의 뒤를 끊으려고 양반의 불알까지 까는 흉악한 놈들이란 말까지 떠돌았었다.

노비로 도둑을 따르는 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비록 도둑을 따르지 않는 자도 모두 도둑들에 묶여 상전을 겁주었다. 그래서 노비문서를 불태워 강제로 해방하여 양인으로 만들게 하였다. 혹은 그 주인을 결박해서 주리를 틀고 매질을 하였다. 노비를 둔 자들은 지레 겁을 먹고 노비문서를 태워 그 화(禍)를 풀었다. 순박한 노비들이 더러 태우지 말기를 원하였지만 기세가 원체 거세어 노비 상전들이 더욱 두려워하였다. 혹 사족이나 노비 상전들이 노비와 함께 도둑을 따르는 자들은 서로 집강이라 불러 그 법을 따랐다. 백정 재인들이 평민 사족과 맞절을 하자 사람들은 더욱 이를 갈았다.

여기에서는 노비들의 처지를 중심으로 기술하고 있으나 서로 접장이라 불러 평등을 구현하려 하였다. 이는 당시의 사회를 평등으로 만들려는 노력이었다.

이런 일은 집강소가 있는 곳에서만 벌어진 것이 아니었다. 충청도 홍성에서 일어난 하나의 사례를 보면 홍주군(지금의 홍성) 갈산리 안동 김 씨 집의 종으로 있던 문천검이란 사람과 이승범이란 사람이 자기 상전인 김 씨를 대추나무에 발가벗겨 매달고 불알을 깠다고 한다.

이것은 평소에 그 양반의 횡포한 유세 아래 울던 민중이 양반 개인을 징벌하는 동시에 그 양반의 종자가 없어지게 하기 위하여 불알을 발은 것이다. 민중이 양반에 대한 원한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이런 사실을 보아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신분문제와 함께 청춘과부 등 여성의 처지 개선은 농민구들의 상호 호칭에서도 나타난다. 그들은 누구나 상호 호칭을 접장(接長)으로 통일하였다. 접장은 상전과 종, 수령과 아전, 양반과 평민, 남자와 여자, 어른과 어린이 등 반상과 귀천과 상하와 남녀와 자유를 아울러 존경의 접속사로 불린 것이다.

접장은 본디 도학 교단에서 시작한 상호의 존칭이었으나 이를 광범하게 적용된 시기는 집강소 기간이었던 것이다. 보기를 들면 어른은 어린이에 동동접장, 남자는 여자에게 부인접장으로 불렀다. 이 접장은 러시아에서 사회주의를 추구한 1914년에 ‘동무’라 호칭한 연대보다 훨씬 앞선 것이다. 이는 신분해방운동, 양성평등운동, 연령에 따른 권위타파운동의 단초였던 셈이다.

4) 빈민구제와 토지문제

집강소 활동 기간, 농민군들이 열성적으로 전개한 항목은 빈민구제일 것이다. 곧 빈민을 구휼하는 일이었다. 전봉준은 지주와 부호들에게 강제로 돈과 쌀을 빼앗지 않았다. 그 대신 부호들로부터 시세보다 싼 값으로 쌀을 사서 시세보다 싼 값으로 빈민들에게 되팔았다. 부호들에게는 먹고 남는 식량이지만 빈민들에게는 거저 얻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나 대가를 지불했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쌀을 받을 적에는 어김없이 표지(標紙, 어음과 같이 뒷날 지불을 약속하는 증표)를 발행했다. 전봉준 관할의 집강소에서는 이를 어김없이 실행한 것으로 보이나 김개남 관할의 집강소에서는 강제로 빼앗은 것으로 보인다. 아무튼 이것을 “손상익하”(損上益下, 위를 덜어 아래를 보태줌)라 부른다.

위에서 보이는 대로 고리채 정리를 내걸었으나 구체적 사례는 많이 보이지 않는다. 고리채는 장리(長利)라 표현되는 고율의 이자를 말한다. 적어도 빚을 내서 1년 뒤에 갚는다면 원금의 배쯤 물어야 하는 민간 금융의 관례이다. 이는 자연스레 해소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 가장 봉건체제의 주요한 버팀목이 되었던 토지문제이다. 이 문제는 그야말로 단순하지 않았다. 12개조 폐정개혁에서 말하는 “토지의 평균 분작”은 그 개념규정이 분명하지 않다. 토지의 경작권을 고루 분배한다는 뜻인지 토지 소유권을 고루 갖게 한다는 뜻인지 알 수 없다.

이 조항은 결코 신분제도보다 더욱 정부와 쉽게 동의할 사항이 아니었을 뿐만 아니라 일개 현지 사령관이 함부로 합의할 사항이 아니었다. 왕조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개화파가 일제와 야합해 추진한 갑오개혁에도 이 조항은 전혀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농민군이 지향한 가장 핵심적 개혁조항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이다. 느슨한 사적 소유, 불분명한 재산권 인정 관계에서 이를 제외하고서는 밑으로부터의 변혁은 알맹이가 빠지는 꼴이 될 것이다. 그런데 구체적 사례가 거의 없다. 짧은 집강소 기간에 실현할 수 없는 시간적 조건에도 그 원인이 있겠다.

5) 기독교의 공인과 이권 침탈

외국의 이권 침탈의 문제는 개항 이전부터 꾸준하게 제기되었다. 척사파들은 서학의 금지와 함께 이를 과감하게 배격하라고 조정에 요구하였다. 그 당시의 사정으로 보면 제국주의적 침탈에 맞서 일리가 있는 주장이었다. 동학 교단도 척사파의 이런 의지에 동의하였다. 그들은 서구의 자본주의 발달에 따른 무역관계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장에 동의할 내용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그 시기 아시아에서도 후발주자인 조선은 강요에 따라 가장 불평등 통상조약을 맺었던 것이다.

미국 선교사 앨런은 갑신정변 때 부상을 당한 민영익을 치료해 준 뒤 민비의 신임을 받았다. 그는 궁중의 어의가 되어 전등·전화·수도 가설권 등 이권을 따냈다. 후발주자인 미국은 많은 이권을 거머쥘 수 있었다. 미국은 경인철도 부설권을 양도받았다가 일본에 팔아먹었으며 1895년에는 노다지금광인 운산금광 채굴권을 따내 40년 동안 1,400만 달러의 순이익을 챙겼다.

독일인 뮐랜도르프는 1882년부터 1885년까지 재정고문이 되어 무지한 후진국 조선의 재정과 외교를 주물렀다. 그는 처음에는 중국의 이익, 다음에는 독일의 이익을 챙기다가 마지막에는 조선의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러시아와의 관계 설정에 힘을 기울이다가 쫓겨났다. 이들은 기묘한 술수와 회유, 협박, 사기의 방법으로 고종과 민비와 민 씨들을 주물렀다.

몇 가지 구체적 사례를 더 들어보자. 1889년 아시아에서는 가장 늦게 조선 조정에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맺었다. 그 조약 항목 속에 일반적인 통상 외교 말고 새로운 항목이 삽입되었다. 곧 통상조약에서 가장 금기가 되는 아편의 수입권과 함께 기독교 선교권을 인정하는 항목이 들어간 것이다.

프랑스는 천주교의 자유 선교권을 위해 이 조항을 넣었다. 오랜 동안 탄압을 가했던 천주교를 공인한 것이다. 알렌이 이 조항을 넣게 공작한 뜻은 바로 미국이 개신교 선교권을 자동적으로 인정받으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끝내 천주교와 개신교는 척사파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대로 기독교 선교활동을 벌일 수 있었다.

기묘하게도 영국이 중국을 아편시장으로 만든 것처럼 조선의 아편 수입과 함께 기독교의 선교가 공인된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힘이 없었던 불교는 아직도 도성에 절을 지을 수 없었으며 승려들의 도성출입도 허용되지 않았다. 더욱이 동학은 여전히 좌도난정(左道亂正)의 율에 따라 공인을 받지 못했다.

6) 외국상품 불매운동과 외국세력 추방운동

이 당에 사치품을 중심으로 한 외국 상품이 범람하자 불매운동이 세차게 벌어졌다. 더욱이 동학교도들은 그 불매운동의 중심 역할을 했다. 1893년 2월 광화문 앞에 모여 교조신원을 요구했으나 고종은 “이단을 내세워 야료를 부리는 자들은 선비로 대우할 수 없으며 나라 법에 따라 죽음이 내려질 것이다”라는 지시를 내려 동학의 승인을 거부했다.

그 뒤 서울에서는 서양과 일본 배척운동이 크게 일어났다. 기독교를 배척하고 선교사를 추방하고 침략세력을 몰아내자는 방문이 프랑스공사관, 미국공사관, 일본공사관을 비롯해 미국인 교회당, 학당 등 전국 곳곳에 붙여졌다. 척왜양창의(斥倭洋倡義)를 분명하게 내걸었다.

프랑스공사관에서는 본국에 프랑스 군함 3척을 인천에 파견해달라고 요청했고 미국과 일본공사관에서도 그 대책에 부심했다. 그 주동자를 일본공사관에서는 전라도 동학당 6만여 명이 서울로 향해 올라갔다고 보고했으며 동경일일신문은 전주에서 그 당류 4천여 명이 모여 외국 선교사와 상인은 모두 물러가라고 요구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삼례집회를 두고 정세를 분석한 내용들일 것이다.

연이어 3월에 보은과 원평에서 대대적 집회를 열었다. 보은집회에 보낸 통고문에는 “지금 왜양의 도둑이 서울에 들어 있어 큰 난리가 극도에 달해 있다. 진실로 지금의 국도를 보건대 끝내 오랑캐의 소굴이 되었다. 왜양을 쓸어 큰 은혜를 갚는 의리를 본받고자한다”고 선언했다.

보은집회에서는 수만 명의 교도들이 모여들어 서양세력과 일본세력을 배척한다는 척양(斥洋斥倭)의 기치를 내걸었다. 또 조정을 향해 크게 네 가지 요구조건을 내걸었다. 첫째 교조 최제우의 원통함을 풀어 달라는 것, 둘째 교도의 탄압을 중지하라는 것, 셋째 외국의 세력은 물러가라는 것, 넷째 외국 상품을 배격하고 목면(무명)을 입으며 국산품을 애용하자는 것 등이다.

음성 감곡면 사곡리에 살던 김영상의 <울산일기>에 따르면, 일본과 서양세력을 배척할 것을 앞에 내걸고 민씨 세도를 쫓아낼 것, 호별 단위로 거두는 군포세를 없앨 것, 악화인 당오전을 없앨 것, 각 고을의 세미를 바르게 매길 것, 무명옷을 입고 외국의 물품을 팔지 못하게 할 것 등 민생무제를 중심으로 그 개선을 요구하였다고 한다.

원평집회를 주도한 농민군 지도자들의 의식은 초기단계부터 외세배격과 외국 상품 거부 의지는 더욱 강렬했다. 보은집회에서 이들 남접의 강경한 요구를 뒤늦게 동조한 것이다. 따라서 남북접의 이런 표방은 바로 농민전쟁의 중심 지향점이 되었던 것이다.

집강소 활동을 통해서 이를 구체화하고 실천운동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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