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연구논문> 연구논문

연구논문

중국의 동북공정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3-07-09 14:49 조회4,321회 댓글0건

본문

              

중국의 동북공정

1) 시작하는 말

오늘날 중국의 고구려-발해의 역사 등 한국고대사의 왜곡문제를 놓고 민족감정과 결부되어 국민들의 관심이 고조되고 있으며 그 대응에도 열띤 반응을 보이고 있다. 이에 고구려사가 중국사가 아닌 한국사에서 차지하는 의미와 이른바 “동북공정”과 “요하문명론”의 실상을 현재적 관점에서 알아보기로 한다.

동북공정은 한마디로 말해 억지 역사조작을 펴고 있다. 오히려 “고구려사 왜곡이 아니라 고구려사를 도둑질하고 있다”고 말해야 옳을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동북공정에 따른 고구려사 정의는 고구려의 옛 영역이 현재 중국의 영토 안에 있다는 사실 이외에는 하나도 맞는 논리가 없다. 발해사도 이와 맞물려 있다.

이어 전개하고 있는 요하문명론은 동북공정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고 있다. 요하 동쪽에서 이루어진 고대문명은 황하문명과 다른 흐름을 가지고 있음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증명하고 이를 중국 고대사의 한 부분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이다.

2) 동북공정(東北工程) 이전의 고구려사 인식태도

중국에서 1980년대 이전에는, 고구려사를 이론(異論)의 여지없이 한국사로 보았다. 북경대학과 복단대학의 동양사 교재와 일반 중고등학교의 교과서에도 이런 내용이 그대로 기술되어 있다. 중국 왕조시대의 전통적 고구려관에 대해서는 뒤에서 다시 언급하겠지만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한 1850년대에도 이런 고구려 역사관은 변함이 없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할 시기에는 오히려 고구려사를 조선의 역사로 보면서 소수민족의 왕조를 동등한 역사적 위치에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는 사회주의적 민족관과 결부되어 나타났다. 중국의 근대사학에서는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는 전통적 관념과 중국의 천자가 천하의 주인이라는 중화질서를 반영하는 데서 출발하였다.

지난해 언론에 보도된 주은래의 견해는 이를 단적으로 알려주는 사례이다. 소수민족을 보호하고 따라서 소수민족의 역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논지였다. 주은래는 이런 의식을 바탕에 깔고 김일성과 조일 국경문제를 해결하였던 것이다.

그 배경은 역사적 근거를 지니고 있기도 하다. 곧 중국이 일제의 침략을 받으면서 민족모순과 계급모순의 선결문제를 두고 논쟁이 일어났다. 모택동은 민족모순의 해결을 선결 과제로 제시하였다. 이 원리에 따라 중국 주변국들이 일제의 식민지 또는 침략을 받는 현실조건에서 소수민족을 보호하거나 동지로 공동전선을 펴야하는 당면 과제가 놓여 있었던 것이다. 특히 식민지 한국과의 관계가 주변 어느 국가보다도 관심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는데도 1980년대 이후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일사양용(一史兩用)의 이론을 들고 나왔다. 곧 한 역사를 두 나라에 적용시킬 수 있다는 이론이었다. 이에 따르면 고구려 역사는 한국사가 될 수도 있고 중국사가 될 수도 있다. 2001년에 편찬한 교과서에도 고구려사를 한국사로 인정하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중국 역사학자들은 1994년부터 국제학술회의 등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변방정권이었으므로 당연히 중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아울러 고구려를 세운 민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므로 중국 소수민족 역사에 포함되어야 한다고도 주장하였다. 엉성하기 짝이 없는 이론이었다. 그리고 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본격적으로 고구려사를 전공한 자들도 아니었다.

2000년부터는 고구려사 연구자를 양성하는 사업을 벌여 100여명의 학자가 자료수입 또는 유적 발굴에 참여하였다. 중국으로서는 거대한 국가사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들 학자는 고구려의 역사에서 국내성을 수도로 정한 시기는 중국사, 평양 천도 이후는 한국사에 포함된다고 주장하였다. 현재의 영토를 기준으로 고구려사의 정의를 규정하고 있다. 한 민족은 이동할 수도 있고 한 국가는 영토를 빼앗길 수도 있으나 역사가 바꾸어지는 것이 아님을 전혀 간과해버린 것이다.

한편 2001년 북한이 유네스코에, 평양일대에 보존된 고구려 고분벽화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해달라고 신청하였다. 이 때 중국은 심사국의 자격으로 북한의 유적을 돌아보고 관리 소홀과 접근의 어려움을 들어 등재를 보류시키는 데 앞장섰다. 그 저의가 없다면 상당히 합리적 근거가 다고 볼 수 있다. 이어 그 동안 팽개쳐 두었던 자국에 있는 고구려 유적을 대대적으로 보수하고 발굴하고는 세계문화유산의 등재를 신청하였다. 유네스코 총회는 지난 2004년 7월 이 두 가지 등재 신청을 결정하였다.

3) 동북공정의 주요 내용

동북공정의 과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2002년 2월부터 동북지역의 여사와 현황에 관한 학술작업인 동북공정을 대형 국책사업으로 지정해 고구려 편입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3조여 원의 예산을 투입하여 동북공정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동북공정은 일종의 학술 프로젝트로 국가연구기관인 사회과학원에서 주도하게 하였다. 중국의 사회과학원은 행정구역 단위마다 설치하였다. 사회과학원에는 국가기관 요원들, 곧 공산당 간부라든지, 고위 행정관들이 고문 등의 이름으로 참여한다.

오늘날 동북지방은 동삼성(東三省), 곧 요녕성, 길림성, 흑룡강성을 일컫는 지역으로 예전 만주일대를 말하며 옛 고구려와 발해의 영역에 해당한다. 물론 국내성이 있던 집안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간도라 부르는 연변이 이 지역에 들어있다. 백두산은 북한과 1960년대부터 협의를 거쳐 천지를 반 토막을 내서 국경선을 그어 각기 영토로 확정하였다.

동북공정의 기본목적을, 고구려와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를 중국의 고대 지방정권으로 보고 그 자료의 수집·발굴, 유물·유적의 발굴·보존·정비 등에 두었다. 이 프로젝트에 따라 먼저 집안현의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등 유적의 정비 사업을 벌였다. 주변에 널려있는 수천 채의 민가를 헐어내고 내부를 대대적으로 보수하였으며 보호를 구실로 관람객의 출입을 막았다. 또 요양지방과 심양지방의 고구려 성곽을 수리하고 출입을 완전히 통제하였다.

조금 늦게 동경성 등 발해유적에도 비슷한 조치를 취하였다. 고구려 유적사업 다음으로 발해 유물보전사업을 벌이고 있다. 고구려와 발해를 동일 선상에 놓고 접근하는 것이다. 따라서 발해도 중국 소수민족 지방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아무튼 이와 함께 중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규정하였다. 이를 주도한 지방은 고구려 유적·유물을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요녕성이었다. 요녕성 사회과학원이 그 대행자가 된 셈이다. 그 근거는 크게 다섯 가지를 들었다.

첫째,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朱蒙)이 중국의 고대역사에 등장하는 고이족과 고양씨(高陽氏)의 후손이라는 것이다. 둘째로 고구려가 중국에 조공(朝貢)하였기 때문에 고구려는 중국의 속국이라는 것이다. 셋째, 고구려가 벌인 수나라와 당나라와의 전쟁이 국가와의 전쟁이 아니라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가 벌인 통일전쟁이라는 것이다. 넷째, 고구려가 멸망한 뒤 그 유민들이 거의 당나라로 끌려가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혈연적 계승이 단절되었다는 것이다. 다섯째,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지 않았다는 점으로 고구려의 왕족은 고씨, 고려의 왕족은 왕 씨라는 근거를 들었다. 그 중간에 낀 발해의 왕족은 대 씨였으니 말할 나위도 없이 여기에 포함될 것이다.

아주 비과학적인 역사인식에 토대를 둔 터무니없는 근거의 제시였다. 이 근거의 오류를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한다.

4) 고구려를 중국사로 주장하는 논리의 허구

위에서 지적한 대로 중국 측 주장의 다섯 가지 논리의 허구를 지적해보자.

첫째, 고이족 고양 씨의 후예문제이다. 고이족은 산동지방에 살았던 부족이었으나 고구려 영토로 이동했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 고양씨(전욱의 호)는 중국 고대사(BC 2천 5백년)에 제왕으로 등장하는 전설의 인물이다. 중국의 근대 역사학자들도 그 인물의 실체를 인정치 않는다. 고구려 왕실이 고 씨 성을 가졌다할지라도 고양 씨의 시대와는 2천여 년(고구려 건국은 BC 37년)의 간격이 난다.

뒤에 중국 고 씨의 후 손을 빗댔다는 일부의 기록이 있으나 과시하기 위한 조작이었다. 주몽은 해(解)씨 아버지를 두었으나 고대국가의 일반적 관례처럼 창성(創姓)하여 고를 성으로 삼았을 뿐이다.

둘째, 중국에 조공하였다는 근거도 논리가 닿지 않는다. 중국 제국은 명분을 중시하여 스스로를 천자국이라 표방하고 주변국가에 조공을 하게 하였다. 이를 거절하면 천자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하여 정벌하였다. 따라서 조공은 명분을 주는 외교 형식이었다. 종주국과 복속국의 관계라 할지라도 통치와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는 엄연한 독립 국가를 보장하였다.

조공한 나라가 중국의 속국이라고 본다면 일본 유구(오키나와)와 태국, 베트남 등 동남아 국가들이 모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또 조공을 성실하게 한 조선을 가장 우선순위에 들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수와 당나라와의 전쟁을 통일전쟁으로 보는 주장은 더욱 논리에 어긋난다. 고구려는 요동일대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천리장성을 쌓고 대항하였다. 엄연히 지방정부 차원이 아닌 독립국가로 견고한 방어망을 구축하고 7백여 년을 지탱하였다. 중국에 역대로 그런 지방정권이 있었던가?

역사적으로 중국에서는 수·당과 싸운 고구려를 아주 간악한 오랑캐로 보아왔다. 수나라 군사들의 시체가 고구려 땅에 널려 있자, 뒤를 이은 당나라는 이들 시체를 거두게 해달라고 요청하고 위령제를 지냈다. 또 당 태종은 “수나라의 원수를 갚겠다”고 공언하면서 고구려 정벌에 나섰던 것이다. 수와 당은 한 민족이 건설한 왕조였다는 인식을 보여주는 사례일 것이다.

넷째, 고구려 유민들이 거의 당나라로 끌려가 혈연적 계승이 단절되었다는 주장도 언어도단이다. 포로로 백만 명쯤 끌려갔다고 해서 고구려 유민을 모두 이주시켰다는 강변이다. 그야말로 대다수 유민들은 그 영토 안에 살면서 안동도호부에 저항하였고 뒤에 발해를 건국하였다. 또 많은 유민들은 당나라로 끌려간 것과는 달리 자발적으로 신라로 투항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처럼 손쉽게 생활터전을 바꿀 조건이 아니었다.

다섯째, 고구려와 고려와는 계승성이 없다는 주장이다. 그 근거로 세습왕조의 성을 달리했다고 말한다. 계승성을 성이 같은 왕조로 친다면 중국의 역사정권은 하나도 동일한 성을 가진 적이 없다. 다만 예외로 유비가 변방에 세운 촉한(蜀漢)만이 한나라의 성을 이은 국가였다.

고려는 고구려가 멸망한 지 250여 년이 지났으나 신라를 정통으로 계승하지 않고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표방하였고 고구려에서 조성한 동명왕릉을 시조릉으로 받들고 보존하였으며 평양을 서경(西京)이라 하여 제2수도로 삼았다.

또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의 왕족을 받아들이고 발해 역대 왕의 묘를 세우게 하고 대대로 받들었다. 발해를 고구려와 동일한 선상에 놓고 보았던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요동을 “우리 땅”으로 보아 중국이 쇠약한 틈을 타서 말기에 이성계를 시켜 요동정벌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5) 동북공정 추진의 배경

60년대 중국의 주변국가인 티베트와 민족분쟁이 야기되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중국은 티베트를 자국의 영토로 인정하여 독립국가로 인정치 않고 티베트자치구를 선포하였던 것이다. 또 위구르자치구를 두고는 서북공정을 벌이고 있다. 70년대에는 베트남과 국경분쟁이 야기되어 많은 분쟁을 벌이고 있다.

1992년에는 한·중수교가 이루어져 많은 한국인들이 만주일대로 몰려가 고구려와 발해유적을 찾아갔다. 한국인들은 단순한 관광이나 유적 답사의 차원을 넘어서는 행태를 보였다. 그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면 이러하다.

승용차에 “고구려는 우리 땅” 또는 “백두산은 우리 땅” 따위의 프랑 카드를 걸고 돌아다녔다. 또 많은 제물과 제주를 본국에서 꾸려가서 울긋불긋한 제복을 입고 천지를 바라보며 제사를 올리기도 하였고 제주를 뿌리기도 하였다. 또 백두산 정상에서 태극기를 휘날리며 만세 삼창을 소리 높여 외치기도 하였다. 중국의 경비원이나 감시원들은 안내를 맡은 조선족에게 벌금을 물리는 등 제재를 가하였다.

연변 일대를 돌아다니면서도 거리나 술집에서 “고구려는 우리나라” 또는 “간도는 우리 땅”이라고 외치면서 통일이 되면 우리가 찾아야 한다고 떠들었다. 과격한 인사들은 이 문제를 놓고 조선족이나 중국 측 학자들과 “연변조선족 자치주(간도)는 한국의 영유”라는 주장을 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마찰을 빚었다.

소련연방이 해체된 뒤 많은 소수민족들이 독립을 외치며 분쟁을 야기해왔다. 중국의 소수민족, 특히 9백만 명에 이르는 만주족이 독립을 주장하려는 낌새도 있었다. 또 자치구를 형성하고 천만 명이 넘는 소수민족인 위그르족과 몽골족은 끊임없이 분리 독립을 요구하는 분위기에 휩싸여있다. 특히 연변지역의 조선족이 한국과 연대하여 앞으로 연변일대와 백두산을 중심으로 독립을 요구할지 모른다는 의구심도 있었다. 이는 조선족 2중 국적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중국 땅에는 50여 개의 소수민족이 존재하며 숫자가 많은 경우, 자치주·자치구가 형성되어 고유의 언어와 풍속을 지키면서 살게 하고 있다.

아무튼 동북공정의 목표를 “동북변경지역의 안정을 유지하고 발전을 촉진키 위한 것”이라고 전제하고 “동북 아세아는 10년 전부터 세계의 주목을 받는 지역이 되었고 이 지역에서의 러시아, 북조선, 한국, 몽골, 일본, 미국 등의 국가와 중국이 갖는 쌍방관계·다자관계는 매우 큰 변화를 일으키고 있으며 부단히 변화하고 있는 중이다”(중국사회과학원 홈페이지)고 그 배경을 설명하고 있다. 이 설명은 학술 연구와는 관련이 없는 내용이다.

6) 고구려 왕조의 특징과 후기의 역사인식

고구려의 국가체제가 천자를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제적 군현제를 골간으로 한 중국의 역대정권과 다른 특징을 들어본다. 그 역사적 실체는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제도에서 나타난다. 고구려는 고대국가를 형성하면서 독자적 정치체제를 갖추었다. 국가형성의 초기에 독자적인 왕의 칭호 또는 관직명에 잘 드러난다. 관직명에서 태대형(太大兄), 대형, 소형 등에서 나타나는 형(兄)은 족장세력을 편제하는 관직이었으며 태대사자(太大使者), 대사자, 상위사자 등에서 나타나는 사자(使者)는 왕권을 수행하는 관직이었다.(임기환의 <고구려정치사 연구> 참고) 곧 초기 5부체제의 부족연맹체에서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그 특징을 드러내는 관직명이었다.

둘째는 고구려는 다종족 국가로 북방문화를 수용하였다는 데 또 다른 특징이 드러난다. 곧 부여를 중심으로 옥저, 동예, 숙신, 선비 등 만주와 한반도 북부의 여러 종족집단을 통합한 최초의 통일국가였다는 점이다.(임기환의 견해) 이는 중국 본토에서 성립한 한족 국가와는 그 사회성격이 완전히 달랐다.

후기에 와서 중국문화와 정치체제를 수용하면서도 그 한계를 그어 몰입하지 않고 북방의 유목민족의 문화와 생활풍습을 토대로 유지·발전하였던 것이다. 그 보기가 관직명만이 아니라 음식, 온돌, 씨름에서도 드러나고 있다. 한 보기를 들면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여자들의 치마에 주름을 잡히고 있는 그림이 그려져 있는데 중국 여성 옷은 주름을 잡지 않는다.

한편 국어학자들도 초기 고구려왕의 호칭과 여러 가지 용어에서 중국과 다른 고유용어를 추적해 설명한 연구서들이 나와 있다.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수용하면서도 고유의 호칭을 그대로 고수하였다는 설명이다.

또 700여 년 동안 국가를 유지하고 요동일대에서 중국의 나라들과 맞서 싸우고 영역을 확장하거나 보존하였으며 후기 단계에 대동강가의 평양에서 수도를 정하였다. 고구려가 멸망한 뒤 고구려 유민이 세운 발해가 그 정통을 이었으며 발해가 멸망한 뒤 고려가 그 정통을 계승하였다.

발해를 세운 대조영은 중국의 기록대로 “고구려의 별종”이었다. 발해도 건국한 뒤 고구려처럼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였다. 대조영은 고구려의 경우처럼 당나라에 맞서 영토를 확장하고 독립 국가를 건설하였다. 지방정권의 수준이 아니었다. 대조영의 아들 무왕은 일본에 글을 보내면서 “대국을 맡아 여러 변방을 총괄하며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 부여의 풍속을 이어가고 있습니다”라고 천명하였다. 발해의 뿌리가 부여와 고구려에 있음을 분명하게 표현한 것이다.

일본 학자들은 흔히 발해의 상층부는 고구려 유민, 하층부는 말갈족이라 규정한다. 그 지배세력은 왕족인 대(大)씨와 고구려 왕실의 혈연관계에 있는 고(高)씨였다. 말갈족을 포함한 고구려 유민들은 거의 발해의 땅에 살았다. 비록 유민들이 당나라로 끌려가기도 하고 신라로 귀화하기도 했으나 이는 어디까지나 소수였다.

다음 고려는 분명하게 국명에서 나타나듯, 고구려와 발해를 계승한다고 표방하였고 이를 국가 이데올로기로 내세웠다. 거란(뒤에 요 건국)이 발해를 멸망시켰을 때 고려는 동족의 나라를 멸망시킨 거란을 적으로 돌려 고토 회복전을 폈다. 그 결과 압록강 일대를 확보하였던 것이다. 또 왕자 대광현을 비롯하여 유민 10만여 명을 받아들였다. 혈연의 계승이 아니라 정신적 정통의 계승이었다.

993년 요의 소손녕이 대거 침입해 왔을 때 서희는 화의의 교섭에 나가 “우리나라는 고구려의 옛 땅에 터전을 잡았소. 그러기에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지 않소? 도읍도 평양에 정했소. 만일 땅의 경계로 따져볼 것 같으면 그대 나라의 동경은 우리 지경에 들어오게 되오”라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은 바로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하였다는 역사인식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대목이다.

이런 기본 인식에서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편찬하면서 고구려사를 본기(本紀)에 편집해 한국사로 규정하였으며 일연도 <삼국유사>를 쓰면서 고구려를 신라, 백제와 같은 민족국가로 단정하였다. 실학자인 유득공은 “그 대 씨는 누구였던가? 그는 고구려 사람이었다. 그들이 차지하였던 땅은 어디였던가? 그곳은 우리의 고구려였다”고 썼다. 중국 기록에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내용이다.

고려 말기 이규보는 <동명왕편>을 지어 고구려의 건국과 그 시조를 찬양하면서 신라의 시조인 혁거세편을 쓰지 않았다. 또 이승휴는 <제왕운기>를 쓰면서 발해는 고구려를 이은 나라이며 그 계통이 고려로 이어졌다는 역사인식을 보여주었다.

조선시대 고구려 인식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건국 초기부터 이런 인식이 전수되었다. 세종은 평양에 고구려 시조를 모시는 묘사(廟祠)를 새로 짓게 하고 몸소 나아가 제사를 올렸다. 국조를 받드는 의식이었다. 또 세종은 고구려가 수당을 물리친 무용담을 책으로 엮어 무신들의 교재로 삼게 하였다.

조선전기에 산 최부는 표류하여 북경까지 갔을 때 그곳 사람들이 “그대의 나라에 무슨 장기가 있기에 수당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느냐”고 묻자 “고구려는 관민이 단결하여 변방의 소국이었으나 천하의 백만 대군을 두 번이나 물리칠 수 있었으며 지금은 신라, 백제, 고구려를 합쳐 한 나라가 되었다"(漂海錄)고 대답하였다. 연산군 때 영의정을 지낸 한치형은 요동일대에 사는 주민을 ”우리나라 사람“이라고 말했다. 숙종은 신하들을 대하여 살수대첩의 고사를 떠올리며 을지문덕을 모신 사우에 제사를 올리게 하였으며 영조는 동명왕릉을 수축하고 자신이 직접 제문을 지어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한편 고구려는 백제, 신라와 한 민족 국가임을 증명하는 요소들이 많다. 민족 구성의 기본 요건은 혈연·언어·문화·풍습을 공유하는 것이다. 삼국 주민의 혈연은 물론 언어가 동일하였으며 씨름, 온돌, 음식 등에 있어서 한 문화권을 형성하였다.

한 보기를 들어보자. 거칠부는 고구려를 정탐하려고 잠입하였다. 그는 고승인 혜량법사에게 가서 설법을 들었다. 혜량법사는 신라로 망명하였다. 혜량법사가 죽령을 넘어올 때 길가에서 거칠부를 만났다. 두 사람은 정담을 나누면서 신라로 들어왔다. 이 기록에는 통역을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는 말이 없다. 고구려와 신라는 말이 같았음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사례일 것이다.

고구려의 중 도림은 백제로 가서 개로왕과 바둑을 두어 친분을 쌓고 개로왕으로 하여금 궁궐 역사를 벌이게 해서 국력을 소모시키는 공작을 벌였다. 두 사람은 통역을 두지 않았다. 이도 두 언어가 같았다는 증거가 된다. 또 백제의 사신이 중국으로 갈 때 신라의 사신을 데리고 가서 통역을 해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7) 중국의 전통적 고구려관

역대 중국의 역사책에는 고구려를 어떻게 인식하였던가? 역대 중국의 주변민족에 대한 인식은 민족차별적인 동이(東夷), 서융(西戎), 남만(南蠻), 북적(北狄)으로 일컬으면서 끊임없이 복속국으로 만들려 하였다. 동쪽의 이민족을 “동이”라 하였는데 그 범위는 만주의 말갈족, 동쪽의 예맥족, 남쪽의 한족(韓族) 그리고 바다 건너 왜족까지 포함시켰다.

이런 의식의 바탕에서 중국의 정사인 <삼국지>에 고구려를 동이전에 포함시켰다. 고구려 역사를 중국의 정사 부분인 본기(本紀)에 넣지 않고 외전(外傳)에 넣었던 것이다. 이 역사기술 방법은 고구려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네 방면의 오랑캐에게 모두 적용되었다.

이런 기술방법은 <수서>, <당서>로 그대로 이어졌다. 또 <송사>(宋史)와 고려에 와서 살았던 송나라 사람 서긍이 쓴 <고려도경>에도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하였다고 분명하게 써 놓았다. 그 보기로 평양을 서경으로 삼아 왕조마저 계승하려 하였다고 기술하였다. 이런 역사기술 방법은 적어도 근대 이전까지 그대로 계속되었다.

당나라 시기, 고구려 유민인 고선지는 실크로드일대에서 많은 정벌전을 벌여 전공을 세웠으나 이민족 출신이라 하여 많은 핍박을 받은 끝에 죽임을 당하였으며 일반 고구려 유민들도 이민족의 대우를 받아 압박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욕을 할 때에도 “꺼즈우리 팡스”(高句麗幇子)라고 하면서 얕보거나 무시하였다.

또 중국 측의 역사기록에서도 고려는 고구려의 후예라고 보았다. 더욱이 명나라는 처음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조선이 고구려의 옛 땅을 찾기 위해 일본을 끌어들였다고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두고 많은 논란을 벌이기도 하였다. 이런 사실은 분명하게 <명사>에 기록되어 있다.

중국 역대 정권과 일반 국민들은 근대와 현대시기에도 조선 사람을 고구려 후예로 보았다. 중국 사람들은 우리의 독립투사들을 보고 “망꿔노”(亡國奴)라는 말과 함께 위에서 말한 “꺼즈우리 팡스”라 욕질을 하였던 것이다. 또 지금도 만주일대에서는 중국족과 조선족 아이들이 싸움질을 할 적에 이 욕설을 한다.

8) 요하문명론의 전개

요녕성 사회과학원에서는 2007년 동북공정이 일단 마무리된 뒤 요하문명론을 새롭게 들고 나왔다. 요하는 중국 본토와 만주, 곧 동북지방을 가르는 천연의 경계선이다. 요하의 동쪽에는 시베리아 지방에서 이룩된 퉁구스계 또는 알타이계와 다른 문명이 전개되었다는 논리를 계발했다. 다시 말해 만주와 한반도는 알타이계 문명이란 이론이 있어왔는데 이를 뒤엎는 것이다.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BC 6천여 년쯤 요하에는 알타이지역이나 황하문명권과 다른 문명이 존재했다고 보았다. 그 근거로 후기 신석기시대에 홍산(紅山)문화의 존재를 확인했다. 곧 빗살무늬 토기를 이 언저리에 있는 최초의 마을로 보이는 사해(査海)마을터에서 용 모습의 돌무더기를 발굴했는데 빗살무늬 토기도 발견되었다. 빗살무늬토기는 한반도 전역에 널리 있다. 또 사람과 돼지가 함께 묻혔는데 옥으로 장사지낸 흔적을 발견했다고 한다. 이 옥은 강원도 고성에서 발견된 옥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요하 언저리에서 암각화도 발견되었는데 포항의 것과 구조가 같다고 보고 있다.

한편 성산자성 성터에서는 70여 개의 치를 발견했는데 고구려의 성 구조와 같다고 보았다. 또 곰발도 발견되었는데 홍산인들이 곰을 제사지낸 흔적으로 보고 있다. 이 곰 관련의 유물은 위에서 말한 용과 함께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의 홍산문화의 특징으로 판단한 것이다. 조양(朝陽)일대에서는 황하 문명권에서는 보이지 않는 비파형 동검을 발굴했다. 비파형 동검은 요동과 한반도 일대에서 널리 발굴되고 있다.

특히 이 지역에는 중국 고대 전설의 제왕ㅇ으로 일컬어지는 황제와 치우천황이 전쟁을 벌였다는 전설이 있고 단군이 세운 고조선의 영역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또 중국의 연나라와 위만조선이 전쟁을 벌인 곳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들 유물의 발굴을 통해 용하(요동)일대와 한반도 문명은 북방계와 구분된다는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이를 근거로 고조선의 영역과 역사가 어디로 속해야 하는가?

서안에 있는 진시황릉의 상석에는 진나라의 영역을 표시해 두었는데 요하를 포함시킴은 물론 한사군의 위치를 대동강 유역까지 포함시키고 있다. 곧 한나라에서 요하언저리와 대동강 주변에 세웠다는 한사군을 진나라에서 세운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있다.

한편 요하문명론과 함께 만리장성을 연장해 발표했다. 종래 만리장성의 종착점을 발해만 아래 산해관으로 표시해 왔는데 이를 수정해 압록강 중하류에 위치한 박작성을 비롯해 북쪽 하얼빈 언저리까지 깔려 있는 고구려-발해의 성들을 만리장성의 연장으로 확대한 것이다. 이렇게 되면 백두산도 자연스레 포함된다.

이 요하문명론과 만리장성 연장은 백두산문화론으로 이어진다. 백두산이 여기에 포함되면 고조선과 대동강 유역으로도 연장된다. 지금 중국 당국에서는 창바이산(백두산) 개발에 열을 올려 남파와 서파를 새로이 개발했다. 이는 북한과 1962년 맺은 국경조약과도 맞물려 있다. 이 국경조약에 따라 백두산 경계는 물론 압록강의 황금평(비단섬)과 두만강의 녹둔도 문제에 맞물려 있다.

9) 그 저의는 무엇일까

거듭 말하면 위에서 지적한 대로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편입하려는 것은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수준이 아니라 고구려를 도둑질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그 의도를 순수한 소수민족의 동화정책에서 나왔다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고구려의 유적을 인류 고유의 세계문화유산으로 보아 보존·관리한다면 보편사적 관점에서 나무랄 일이 아니라 칭찬을 보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이와 관련이 깊은 국경문제에 관심을 돌려보기로 하자.

고구려사와 맞물린 간도문제만 하더라도 1880년대 두 차례에 걸쳐 국경문제와 관련지어 회담을 벌인 적이 있었다. 조선쪽 감계사인 이중화 등은 우리 영토임을 강력하게 주장하였다. 그 뒤 일제는 1909년 이른바 중국과 간도협약을 맺어 간도영유을 넘겨주었다. 이는 분명히 무효이나 오늘날 간도를 찾기 위해 전쟁을 벌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문제도 두 나라는 이성적인 관점에서 포괄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이다.

북한과 중국은 1962년 조중변계조약을 맺은 뒤부터 두만강과 압록강의 수위가 나타나지 않은 백두산 언저리에 21개의 국계비(國界碑)를 세웠다. 이들 비에는 한쪽에는 한글, 한글에 한자로 표기되어 있다. 천지의 경계선도 이때에 이루어졌다. 천지는 5호 경계비와 6호 경계비를 기준으로 각기 영유를 약속하였으나 북한 지도에는 경계선을 긋지 않았으며 중국 지도에는 분명하게 경계선을 그어놓고 있다.

한편 중국 당국에서는 2003년부터 국경지대에 15만 명의 군대를 투입하여 국경선을 지키고 있다. 탈북자를 막기 위한 조치일까, 아니면 사후의 어떤 대비를 위해서일까? 그 저의를 깊이 따져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현재 동북공정의 목적은 오히려 현대사에 70퍼센트 정도의 초점을 두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박영선 포항공대교수) 이런 관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따라서 “고구려사는 현대사”라는 주장이 제기되는 것이다. 중국에서는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이룩한 뒤 대대적으로 고구려가 자국의 역사라는 점을 각인시키기 위해 백일장, 서예대회 그리고 모든 교과서의 고구려가 조선 고대 삼국의 하나라는 구절을 빼는 작업을 벌이고 있다고 한다.

조선족 자치주의 각 급 학교에서 우리말과 우리글을 가르치고 우리 풍속을 인정하면서도 우리 역사는 가르치지 못하게 해왔다. 다시 말해 조선족의 뿌리는 중국에 있다는 뜻이다. 또 근래에는 조선족의 조상을 “신라의 후예”라고 강변하고 있다. 곧 조선민족은 중국의 지방정권인 고구려의 후예가 아니라는 점을 시사시키려는 것이다.

한편 2006년 동북공정에 따른 중간 계획의 논문이 발표되었는데 고조선이 중국민족이 세운 나라로 규정하였고 백두산의 영역을 완전한 중국 영토라 주장하였다. 곧 북한과 1962년에 맺은 북경조약을 부정하고 있다. 다시 말해 북경조약에서 백두산 천지를 반 토막으로 나눈 협약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야말로 억지를 더욱 강화한 셈이다.

아무튼 현재에는 한국 내의 세찬 여론과 외교통상부의 항의를 받고 각종 교과서의 수정작업을 중단하고 있다. 또 요녕성 등 지방에서도 관광 책자의 수정작업을 중지하고 있으나 예전에 발행된 것은 그대로 두고 있다. 하지만 언제 다시 본격적 수정작업을 펼칠지 모른다.

10) 현재 우리는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하는지 물어보자.

이와 관련하여 미래에 일어날 다음의 사항을 가정해 볼 수도 있다. 무엇보다 통일과 관련이 깊을 것이다. 무력통일이든 흡수통일이든 한국 통일이 이루어지면 중국은 북한지역에 대해 고구려 땅의 영유권을 주장할 명분을 만들어낼 수 있다. 만일의 경우, 대동강을 경계선으로 삼자고 우길 수도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통일에 즈음하여 북한의 주민들이 대량으로 국경을 넘어 연변일대로 이주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조선족의 숫자가 늘어나 민족적 갈등을 유발하고 독립을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고구려·발해의 영토와 간도의 영유권을 확실하게 하여 이런 요구를 원천적으로 봉쇄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대응논리는 이런 관점에 맞추어져야 할 것이다. 그래서 적어도 세 가지 정도의 당면과제가 가로 놓여있다.

첫째는 철저한 고구려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 동안 고구려사는 북한 또는 만주일대를 마음대로 답사하거나 조사할 여건이 되지 못하였고 또 남쪽에서는 고구려 전공학자의 강좌가 적거나 북한이 고구려의 정통성을 계승하였다는 문제와 관련되어 연구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다시 말해 신라사의 연구에 열중하면서 고구려 전공학자는 아주 소사였다.

중국의 동북공정이 진행되어 사회적 논란이 빚어지자 어렵게 고구려연구재단이 정부의 지원에 힘입어 발족되었다. 현재는 동북아역사재단으로 개편되었다. 또 국회에서는 특별법을 준비하다가 흐지부지하고 말았다.

둘째, 고구려 정신과 기상을 추상이 아닌 구체적으로 접근하여 선양사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남쪽에 널려있는 고구려 유물·유적을 발굴·보존하여 박물관을 지어 전시하거나 고구려 테마공원을 조성하여 광개토대왕비 등의 모형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고구려 벽화와 문화 등을 담은 영상물을 대중에게 보여 대중화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아차산의 두 보루성에서 1990년부터 유물 1천 5백여 점을 발굴했는데도 현재 서울대 박물관에 방치되어 있다. 구리시와 서울 광진구청 등 유관 지방단체에서 고구려 박물관과 자료관의 건립운동이 벌어지고 있으나 정부에서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 그리하여 이 사업을 추진하려 고구려역사문화보전회가 시민차원에서 발족되어 활동을 벌이고 있으며 고구려연구회 등 학술단체에서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셋째, 북한과 긴밀한 관계를 구축해 공동 대응해야 한다. 2004년 여름, 남북한 역사학자들이 금강산에서 모여 최초로 공동발표회를 가졌다. 남북 역사학자들은 남북역사학자교류협의회(남측대표 강만길, 북측 대표 하종호)를 발족시켰다. 금강산에서는 위 협의회 소속 학자들(남측 200여 명, 북측 60여 명)이 진지하고 활발한 토론을 벌이고 벽화 전시회도 가졌다.

북측은 정치적 문제오하 결부되어 그 한계가 있을 수 있다. 그들은 중국 측의 왜곡된 주장에 대해 직접적으로 거론하지 못하는 듯하다. 다만 고구려가 천년의 “강성대국”이라는 추상적 접근방식을 보인다. 하지만 남북 학자들은 꾸준한 상호 토론을 이룩해야 할 것이다. 또 필요한 정보와 자료도 활발하게 교환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재적 관점에서 고구려사가 우리의 역사임을 밝히고 그 왜곡문제에 접근해야 한다. 또 그 관련 유물은 인류 보편적 가치라는 의식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며 옛 영토를 회복하자는 운동은 절대 지양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통일이라는 민족적 과제를 앞두고 먼저 영토분쟁을 야기해서는 바람직한 방향이 아닐 것이다.

더욱이 중국 동북지방에는 우리 기업이 활발하게 진출하는 지역이며 많은 조선족이 사는 곳이다. 중국에서 벌이는 이 지역 경제개발에 동참하면서 신중한 대응 자세가 요구된다. 정부에서도 이 문제는 민족사 또는 현대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는 인식을 가지고 적절히 대응해야 할 것이다.

관광객들도 비이성적인 태도로 중국인의 감정을 자극해서는 안 될 것이다. 현대의 상황에서 옛고구려 땅 또는 간도일대의 영유권을 주장할 수는 없다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그러면서 고구려의 역사와 기상을 제대로 이해하고 선양하는 작업을 벌여야 한다.

아무튼 중국의 왜곡된 역사공정을 바로잡지 못한다면 주변의 현대 민족국가들은 까마득한 고대국가시기부터 이어져온 차별적인 중화사상 또는 중화주의에 매몰될 것이다. 1912년 손문은 중화민국을 건설하면서 5족 공화를 외쳤다. 곧 한족은 중국의 영역에 사는 만주족, 몽골적, 티베트족, 위구르족 등 이민족이 단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는데 기묘하게도 이들 민족이 사는 지역에 서남공정·서북공정·동북공정을 펴고 있는 것이다.

이들 공정은 중국 패권주의와 맞물려 있다. 중국 패권주의의 부활은 새삼 주변국가의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