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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에게 난세의 길을 묻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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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3-08-26 16:20 조회4,263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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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강 새로운 시대가치가 필요하다.

一. 맹자는 누구인가?

<조기의 제사(趙岐 題辭)>

1. 맹은 성이다. 子는 남자를 부르는 일반적인 호칭이다.
이 글은 맹자가 지은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모두 맹자라 부른다.
편마다 따로 이름이 잇다.

2. 맹자는 鄒의 사람이다.
이름은 軻이고 자는 듣지 못하였다.
추는 본래 춘추시대에는 子爵급의 邾나라인데,
맹자 때에 이르러 추라고 고쳤다.
노나라와 가까워 뒤에 노나라에 병합되었다.
또 다른 말에는,
“주나라는 초나라에 병합되었고 노나라에 병합된 것이 아니다.”라고 한다. 지금의 추현이 그곳이다.
혹자는 “맹자는 노나라 공족 孟孫씨의 후손이다
그러기에 맹자가 제나라에서 벼슬하다가 어머니가 죽자
노나라로 돌아가 장례하였다.

三桓의 자손이 쇠미해져서
다른 나라로 흩어져 벼슬한 것이다.”고 한다.

3. 맹자는 태어나면서 총명한 자질이 있었다.
일찍이 아버지를 잃었고 어려서 어머니의 세 번씩 이사하면서 가르치는 교육을 받았으며,
장성하여서는 공자의 손자 자사를 스승으로 섬겼다.
유가의 도를 배워 오경에 통달하였는데
그중에서 詩와 書에 더욱 뛰어났다.

4. 주나라가 쇠미해지는 말기 전국시대에
合從과 連橫의 兵略을 사용하여 강대국이 될 것을 목표로
다투어 서로 침략하고 빼앗는 것을 일삼았다.
당시에는 인재를 구하는 데,
권모술수를 우선으로 힘쓰는 사람을 가장 현자로 여겼다.

선왕의 훌륭한 도가 쇠락하자
이단의 학설이 아울러 일어났으니.

이를테면 시대에 영합하고 대중을 미혹케 하는
양주와 묵적과 같이 제멋대로 하는 학설이 한둘이 아니었다.

5. 맹자는 堯帝 舜帝 禹帝 湯帝 文王 周公 孔子의 업적이
사라지고, 올바른 길이 막히고, 인의가 황폐해지고,
거짓 학설이 난무하고, 가짜가 진짜를 혼란케 하는 것을
걱정하고 슬퍼하였다.

이에 세상을 걱정하여 주류전하 하였던 중니를 사모하여
제후들을 찾아가 유도로 설득하여
백성들을 구제할 것을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 자를 굽혀서 여덟 자를
바르게 하는 방법은 사용하려들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군주들은 모두 세상일에 어두운 것이라 하여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6. 맹자도 주나라 운수가 끝나고
한나라가 아직 일어나기 전의 상황에서
벼슬에 나가도 태평성대였던 요순시대를 일으키는
도움을 줄 길이 없고,
물러나도 三代의 훌륭한 기풍을 펼칠 수도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서,
죽을 때까지 아무런 역할도 할 수 없음을 부끄럽게 여겼다.

그리하여 예법에 맞는 말을 후세 사람에게 남겼다.

중니는, “내가 말을 남겨 내 뜻을 전하고자 하니
긴절하고 분명한 일을 기록하는 것이 제일이다.”고 하였다.

맹자도 물러나 수준 높은 제자 공손추와
만장의 무리들과 논란하고 문답한 것을 의논하여 모으고,
또 법도가 될 만한 말을 직접 지었으니
모두 7편 261장으로 34,680자이다.

7. 천지의 모든 이치를 포함하고 만물의 이치를 헤아려
서술하여, 인의와 도덕과 성명과 화복이
환하게 실려 있지 않은 것이 없다.

제왕과 공후가 준수하면 태평시대를 이루어
문왕과 같은 칭송을 들을 수 있고,
경대부와 사가 실천하면 군부를 존중하고
충신의 공을 세울 수 있고,
뜻을 지켜 지조를 가다듬는 자가 본받으면
높은 절개를 숭상하여 부귀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시인이 사물에 의탁한 깊은 의미와
小雅 大雅의 바른 말과 같음이 있어,
직언을 하면서도 거만하지 않고 완곡하게 말하지만
비굴하지 않았으니,
세상에 이름 높은, 성인에 버금가는 큰 재주라 할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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