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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암 ‘손병희(孫秉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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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3-12-24 15:50 조회4,41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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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암 ‘손병희(孫秉熙)’

본관은 밀양, 초병은 응구, 그 뒤 규동으로 고쳤으며 일본 망명 때에는 이상헌이라는 가명을 썻다. 호는 소소거사, 도호는 의암. 천도교 제3세 교주, 교종 의암성사 또는 후천황씨라고도 불렀다. 충청북도 청원 출신 손두흥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둘째부인 최씨이며 방정환은 사위이다.

어린시절부터 자기와 같은 약하고 불우한 사람을 도우려는 마음이 자라났다. 가난 속에서도 호방한 기질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고 의리도 남달리 뛰어났다. 22세 때인 1882년(고종 19) 큰조카인 천민의 노력으로 평등사상을 내세운 동학에 입도했다. 입도 3년만에 제2세 교주 최시형을 만나 착실한 신도가 되었다. 이 사이에 동학의 교세는 날로 확산되었다.

1892년에는 최시형 등 간부들과 함께 교조 최제우의 신원운동을 전개했고 동학대표 40여명은 서울 광화문 앞에서 복합상소를 하며 척왜척양을 부르짖었다. 그들은 다시 충청북도 보은군 장내에 모여 ‘보국안민’과 ‘척왜척양’ 등 정부에 대한 본격적인 시위운동을 전개했으며 이 과정에서 최시형의 참모로서 크게 활약했다. 이 과정에서 남 . 북접의 관계가 미묘해지자 최시형은 타협 조절을 대도소에 맡겼다. 손병희는 두령으로서 대도 소장 김연국 등과 함께 남접에 대한 성토를 주장했다. 그러나 오지영의 중재로 1894년 보국안민의 기치 아래 타협해 갈등은 해소되었다. 그 뒤 김연국의 뒤를 이어 북접통령이 되어 통령기를 받고 공주전투 등 항일구국전선에 나섰다. 또한 북접 산하 동학교도를 지휘, 통솔해 논산에서 남접의 전봉준과 합세했다. 그러나 공주 우금치전투에서 패배해 남접과 헤어졌다. 최시형에서 성실한 생활태도와 지략의 역량을 이전받아 의암이라는 도호를 받았다. 1897년 12월 24일 실질적인 제3세 교주로서의 일을 맡게 되었으며 최시형이 체포되어 서울 감옥에서 처형된 뒤에는 마침내 교주가 되었다.

교주가 된 뒤에는 먼저 두령이 참석한 데서 설법식을 거행하고 이후 여러지방을 돌며 동학의 재건에 진력했다. 공주전투에서 패배한 뒤 포교가 사실상 불가능해지자 세계사정을 살피고 동학재건 구상을 위해 미국 시찰을 계획했다.

1901년에는 동생 병흠 . 이용구와 함께 일본 나가사키를 거쳐 대판에 머물렀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책동이 두려워 그 해 상해로 가서 수 개월을 지내며 미국행을 시도했으나 좌절되고 다시 일본으로 되돌아갔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국내의 교도들에게 진보회를 조직하게 해 조직체계를 강화했다. 그리고 교도의 교양을 위해 ‘삼전론 三戰論’을 발표하고 의정대신과 법부대신에게 글을 보내어 정치개혁을 주장했다, 진보회는 지방회원이 11만명에 달하는 큰 단체로 발전했지만 그동안 대전의 관치사건 등으로 많은 회원이 참살, 익사당하기도 했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급속도로 발전, 390여 개의 지회조직을 비롯해 30여만명이 단발을 실천하는 등 생활개선에 앞장서 관민을 놀라게 했다. 그러나 이 단체가 동학교도인 것을 알게되자 정부에서도 1894년 동학농민봉기 당시를 생각해 일본측과 교섭, 이를 탄압하므로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귀국 후 천도교의 조직과 교세 확장에 힘쓰며 친일 배교한 이용구 일파까지도 회유 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이용구는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일진회에 속한 천도교인들의 포섭공작을 펴면서 손병희를 중상모략하며 천도교의 파괴를 꾀했다. 1911년 4월 일제가 성미의 염출마저 금지시키는 탄압을 받았으나, 교도의 자발적인 특별의연금으로 보충시켜나갔다. 1914년 3월에는 무기명성미제가 실시되어 재정상태는 호전되었으며, 이는 3.1운동 때 운동자금으로 쓰이기도 했다. 손병희는 일본망명 중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정신을 함양시키는데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임을 깨달았다. 귀국 후 먼저 보성학교를 비롯해 합동소학교, 광명소학교, 석촌동소학교 등에 정지적인 보조와 일시적인 보조를 해 학교폐쇄를 면하게 했고, 또 문창보통학교에도 관계했다.

1918년 민족자결주의의 영향과 연합국의 승리에 의해 국제정세가 한국독립에 유리해졌다. 이에 권동진, 오세창과 1919년 일본 동경의 2.8 독립선언에 접한 최린, 권동진, 오세창이 협의하면서 독립운동을 거국적으로 벌이기로 했다. 손병희는 천도교측의 대표로 3.1운동의 주동체로 참가, 그해 1월 20일경 권동진, 오세창, 최린 등과 함께 독립운동은 대중화해야 하고 일원화해야 하며 비폭력으로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구체적 방법과 진행은 권동진, 오세창, 최린, 정광조에게 일임했다. 1919년 2월27일 밤 천도교 직영의 보성사에서 독립선언문 2만 1000매를 인쇄, 이튿날 가회동 자신의 집에 민족대표 23명이 모여 다음날 거사를 재확인했다.

그리고 파고다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할경우의 불상사를 염려해 파고다공원 부근 태화관에서 기념식을 거행하기로 했다. 3월1일 기념식을 거행한 뒤 일본경찰에 자진 검거되어 1920년 10월 징역 3년형을 언도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중, 1년 8개월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나 상춘원(常春園)에서 치료했다. 1922년 5월 19일 병사했다. 당시 선생은 62세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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