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넬슨 만델라 (지구의 거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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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3-12-20 13:41 조회4,41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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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난 3년전 2011년 7월 2일부터 7월 7일까지
2018평창 동계올림픽 유치 지원 서포터지로
강원지역 기관단체장과 유치위원회 회원등과 함께
남아프리카 케이프타운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그 기간에
넬슨 만델라가 27년간 감옥살이 하던 외로운 섬을
바다 건너서 망망대해속에서 바라보면서
많은 감명을 받았다.

특별 전용기 비행기 안에서
이명박 前대통령과 조양호 前유치위원장 등
2018평창 동계올림픽의 유치 성공 축제 속에서도
나는 많은 감명과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 지구의 거인이 며칠전 서거하였다,
오늘 아침 나에게
더 많은 생의 신념과 삶의 철학을 생각하게 한다.

전 생애에 걸쳐 모든 것을 껴안은 사나이

인고 끝에 마침내 자신이 저항한 체제 바꾼
살아있는 위인 넬슨 만델라...


‘무지개 나라’의 꿈 남겨두고 무지개 너머로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


넬슨 만델라가 세상을 떠났다.

살아있는 위인으로 살다가 95살로 떠났다.

그리하여 마침내 저항과 투쟁의 20세기가 저물었다고
누구는 생각할 것이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프르트헤이트(인종차별제도)에 저항하다
반역죄로 27년 옥고를 치렀다.

그가 묶인 섬은 물개들의 서식지였다.

고립도 의지를 바꾸지 못했다.

인고 끝에 마침내 자신이 저항한 체제를 바꾼 사나이,
그는 지구촌 민중의 노래
<우리 승리하리라>(We shall overcome)의
살아있는 증거였다.

감옥을 나선 71살 만델라는
보복과 응징이 아니라 진실과 화해를 말했다.

1994년 남아공 대통령 취임식 연설이 끝나고
그가 소개한 인물은
감옥에서 그를 감시하던 교도관이었다.

“여러분, 이 세분이 지난 27년의 감옥생활 동안
내가 용기를 가지고 목숨을 지킬 수 있도록 도와준
분들입니다.”

물론 그들이 수인을 돕기만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화해의 순간은 다음해 럭비경기장,
1995년 남아공 럭비 월드컵 결승전,
6만3천여 관중은 백인 일색이었다.

럭비는 백인들의 스포츠였고,
그들의 초록 유니폼은 증오의 상징이었다.

결승에서 남아공이 뉴질랜드를 꺾었다.

초록 유니폼을 입은 만델라는 백인 주장에게
우승컵을 건넸다.

주장은 “우리는 오늘 6만 3천여 명이 아닌
4200만며의 응원속에서 경기했다”고 말했다.

만델라는 그를 껴안았다.

상징적 장면은 화해의 제도로 이어졌다.

남아공 ‘진실과 화해 위원회’는
부끄러운 과거를 가진 나라들의 모델이 되었다.

진실을 고백하면 처벌하지 않는다.

정신은 참회의 물결로 이어졌다.

위원회 출범 뒤 5년,
스스로 과거를 고백한 이가 7천여명에 이르렀다.

“나는 일생 동안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흑인이 지배하는 사회에도 맞서 싸웠다.
모든 사람이 평등한 기회를 갖고
함께 살아가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것은 대통령 만델라가 아니라
수인 만델라의 1964년 법정 최후진술이다.

그리고 내려놓았다.

만델라는 1999년 대통령직을 타보 음베키에게 넘겼다.

재임이 가능했지만 단임으로 끝냈다.

그러나 만델라의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만델라재단 등을 통해 빈곤과 에이즈에 맞서 싸웠다.

오프라 윈프리같은 부자 흑인들이
그를 지원하는 친구였다.

빌 클린턴 같은 백인 리버럴도 그의 열렬한 지지자였다.

미국, 특히 자유주의자들의
그에 대한 사랑은 각별하고 각별했다.

이렇게 아름다운 마무리를 통해
그는 남아공뿐 아니라
지구촌의 ‘마디바’(어르신)가 되었다.

그의 의지는 세상을 향했지만,
그의 눈길은 내면을 떠나지 않았다.

“27년 동안의 옥살이가 나에게 도움이 된 것이 있다면
고독의 고요함을 통해 소중한 말과 진심 어린 연설이
인생에 얼마나 좋은 영향을 미쳤는지
깨닫게 했다는 점이다”

2000년 7월 14일 남아공 더반에서 열린
에이즈 콘퍼런스에서 그가 한 연설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에이즈로 숨졌다고 커밍아웃했다.

이렇게 그는 에이즈에 묻은 오명도 껴안았다.

1994년 취임식 연설에서
‘무지개 나라’를 만들자고 했던 그는
무지개 너머로 떠났다.

그러나 남겨진 세계가 무지갯빛은 아니다.

살인범죄가 세계 10위권인 남아공은
세계에서 에이즈 감염인이 가장 많은 나라,
여전히 인종 간 빈부 격차가 극심한 국가로 남아있다.

이렇게 그는 위대했을지 모르나,
그가 남긴 유산이 위대하지만은 않다.

2004년 월드컵 열기처럼 대부분의 한국 언론은
그를 비슷한 논조로 추모할 것이다.

“마거릿 대처가 만델라 선생님을 테러리스트라 부르고,
아프리칸더가 그분을 반역자로 부르고,
맑스주의자들이 그분을 신자유주의자라고 불렀을때,
그 발화는 객체보다 주체에 대해 더 많은것을 설명했다.”

(@kohjongsok)

주체들의 정당성은 차지하고라도,
이런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은 무지개 나라가 아니다.

잘가요, 위대한 사람!

분노를 녹이고 용서를 꽃 피운 넬슨 만델라의 죽음...

이 완전 한 인간의 생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작은가,
먼지처럼 작은가

당신의 이름

넬슨 롤리랄라 만델라.

아버지 템부 부족(만델라)과
어머니 코사 부족(롤리랄라)의 양극을 아우른 이름,
분노를 녹이고 용서를 꽃피워
대립 대신 공존을 이야기한 그 이름.

당신의 얼굴.

겹겹의 주름과 점점의 검버섯.

고난이 파놓은 고랑과 인내가 수놓은 얼룩이
함박웃음 짓는 얼굴.

당신의 화해.

증오를 넘은 포용.

아파르트헤이트(백인의 흑인 인종 차별)의 피해자면서
아파르트헤이트를 종식 시킨 ‘기적의 화해’.

당신 이전에도 있었으나 누구도 당신처럼 하지못한
‘화해의 기원’.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얼굴과, 당신의 화해를 기리며

함바 칼레 마디바(잘가요, 위대한 사람)!

2007년 7월 24일 89살 생일을 맞은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이
요하네스버그 ‘넬슨 만델라 어린이재단’에서
어린이들의 축하를 받으며 활짝 웃고있다.

①. 넬슨 만델라가 2003년 6월 20일 아일랜드 골웨이대학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뒤 소감을 말하고있다.

②.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 타운 외곽에서
한 소녀가 국기를 든 채 만델라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다.

이곳은 만델라가 27년간의 수감생활을 마친 뒤 첫 연설을 한 곳이다.

③. 반아파르트헤이트 지도자이자 아프리카민족회의(ANC) 일원인 넬슨 만델라가 출소직후인 1990년 2월 25일 대중 앞에서 불끈 쥔 주먹을 들어보이고 있다.

④. 넬슨 만델라와 아내 위니 만델라가
1957년 결혼식에서 기념촬영을 하고있다.

⑤. 넬슨 만델라가 반아파르트헤이트 지도자이자 ANC 일원이었던 1961년에 찍은 사진, 그해 만델라는 ANC 산하에 ‘움콘토 웨 시즈웨’(민족의 창)라는 군사조직을 만들어 초대 사령관에 올랐고, 이듬해 거주지 이탈 및 파업 선동 혐의로 체포돼 5년형을 선고받고 수감된다. 1964년에는 국가반역죄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⑥. 넬슨 만델라가 ANC 부의장 시절이던 1990년 4월 26일 아내 위니 만델라와 고향 쿠누의 가족묘지를 찾았다.

⑦. 넬슨 만델라와 아내 위니 만델라가 1990년 6월 8일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세계 에큐 메니컬 센터 앞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국가를 부르며 경례를 하고 있다.

⑧. 넬슨 만델라의 대형 사진이 지난 6월 27일 남아프리카 공화국 케이프타운 시빅센터에서 열린 넬슨 만델라 전시회에 진열되있다.



<남아공 인종차별 종식 이끈 만델라 타계>


①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12월 5일 95세로 타계했다. 흑인 인종차별 정책에 맞서다 27년간 복역한 뒤 흑백 간 화해를 주도해 350년 이상 계속돼온 차별을 종식시켰다. 1993년 노벨평화상을 받았으며 이듬해 첫 흑인 대통령에 당선됐다. 10일 거행된 영결식은 100여 명의 각국 정상과 지도자가 참석해 사상 최대의 조문외교 현장이 됐다.

②만델라의 삶에도 반전이 있었다. 종신형을 선고받고 27년을 자유를 박탈당한 채 감옥에 갇혀 있었다. 만델라가 대통령에 당선한 이듬해인 1995년, 남아공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당시 아프리카 대륙의 남단 '희망봉'을 돌아 케이프타운 '테이블마운틴'이라는 산에 올랐다. 정상에선 바람이 몹시 불고 있었다. 시야에는, 좌청룡 우백호 거느리듯, 좌 인도양 우 대서양이 한 눈에 펼쳐졌다. 수평선에는 납작하게 깔린 잿빛 섬 하나가 손에 잡힐 듯 뚜렷이 더 있었다. 섬의 이름은 로벤, "만델라 대통령이 오랜 세월 감옥 생활을 했던 곳이지요." 함께 산에 오른 남아공 사람이 벅찬 음성으로 목이 메며 가리킨다. 까닭 모르게 뭉클했다.

훗날, 만델라의 삶을 소재로 만든 영화 <우리가 꿈꾸는 기적 : 인빅터스>를 보며 그날의 뭉클했던 까닭을 깨달았다. "나를 뒤덮는 칠흑 같은 어둠. 신께 감사하나니 정복되지 않는 내 영혼. 운명의 폭력 속에서도 피투성이 된 내 머리는 결코 고개 숙이지 않느니. 나는 내 운명의 주인, 나는 내 영혼의 선장." 그는 모든 것을 잃고도 굴하지 않았고 그 힘으로 마침내 뜻한 바를 이룬다.

얼마 전 '2013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발표되었다. 리스트에는 정치인, 독재자, 왕족, 종교인, 억만장자, 기업가, 국제기구 수장 등 막대한 권력과 재력과 추종자와 직원 수를 지닌 사람이 즐비하다. 전 세계 72억 인구 중 82인, 즉 1억분의 1 확률로 선정되었으니 대단한 경쟁력을 지닌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들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더 센 사람이 있다. 그건 누굴까? 바로 내몰리고 내몰려서 더 이상 비킬 데가 없는 사람, 빼앗기고 빼앗겨서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사람, 바로 폴워커나 넬슨 만델라 같은 사람들이다.

※INVICTUS(라틴어-인빅터스)는 '굴하지 않는, 정복될 수 없는' 뜻이며 INVINCIBLE(영어-인빈서블)에서 파생됨.

<北 권력2인자 장성택 사형집행>

한 때 북한 권력 2인자로 불렸던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이 12월 12일 처형됐다. 군사재판 결정 직후 사형이 집행돼 공포 정치의 실체를 전 세계에 알렸다. 북한은 장성택의 혐의를 국가전복음모로 몰았지만 실제로는 이권다툼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다. 집권 3년차를 맞은 김정은 유일 영도체계가 공고해졌다는 분석과 내부의 불안정이 커지고 있다는 평가가 상존한다.


<만델라의 진짜 말>


넬슨 만델라를 처음 만난 건 1996년 미국 뉴욕의 어느 헌책방에서였다. 자서전<Long Walk To Freedom>을 읽자 어렴풋했던 거인의 진면목이 오롯이 드러났다. 그의 영결식에는 100명이 넘는 전·현직 세계 정상들이 참석한 데는 울림이 있는 말과 그 말에 힘을 실어준 삶이 있었다.

위대한 투사이자 정치가였던 만델라의 가장 강력한 무기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의 대부분은 27년 동안 교도소 담장을 넘지 못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백인 정부가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이유로 그의 말까지 묶어버렸기 때문이다. 당시 남아공에선 만델라를 인용하는 것조차 불법이었다. 1990년 그가 로벤섬의 감옥을 벗어난 뒤 그의 사상이 담긴 그릇도 비로소 자유를 찾았다.

“모두를 위한 평화와 민주주의, 자유의 이름으로 여러분 모두에게 인사드린다. 나는 선각자가 아니라 국민 여러분의 보잘것없는 종으로서 여기 여러분 앞에 섰다. 여러분의 지칠줄 모르는 영웅적 희생 덕분에 오늘 내가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남은 생도 여러분에게 맡긴다.” 석방 이후 첫 연설부터 세계를 울렸다.

‘넬슨 만델라 메모리 센터’가 만델라의 말을 모아 <넬슨 만델라 어록>(윤길순 옮긴, 알에이치코리아 펴냄)을 펴냈다. “가장 많이 인용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장 많이 잘못 인용”되기 때문이다. 센터는 그의 각종 연설문, 아내를 비롯해 가족, 지인들과 주고받은 편지 다큐멘터리 같은 기록 등 방대한 자료를 토대로 그의 ‘진짜’ 말만을 추려냈다. 예를 들어 이런 식이다. ‘영웅’(Hero)을 펼치면 “부수고 파괴하는 것은 아주 쉽다. 영웅은 평화를 이루고 건설하는 사람”이라는 만델라식 정의가 적혀 있다. ‘사랑’(Love)에 대해서는 그가 뭐라고 언급했을까. “모두들 나를 만지고 싶고 껴안고 싶어 하니, 이들의 사랑 때문에 내가 죽을 판이다. 나의 팬인 사람들, 나를 숭배하는 사람들로부터 나를 지켜야 할 지경”이라고 너스레를 떤다. 또 ‘자신에 대해서’(Himself)에서는 “가끔은 나도 다른 지도자들처럼 발을 헛디뎠으니, 나만 고고하게 빛난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고백이 등장한다. 책임(Accountability)부터 시오니즘(Zionism)까지 317개 주제어로 만델라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다. 그가 오래 머물렀던 교도소, 그가 가장 많이 고민했던 아프리카와 남아공에 관한 내용이 많은게 특징이다.

그래서 이 어록은 ‘만델라 초보자’ 보다는 어느 정도 그에 익숙한 독자들에게 권할 만하다. 여느 책처럼 첫 장부터 쭉 읽기보다는, 특정 주제에 대해 ‘마디바’는 뭐라고 말했을까 궁금할 때 펼쳐보는 방식이 어울릴 것 같다. 사전을 읽는 경우는 드무니깐. 인간의 자유와 평등, 인종차별 철폐와 민주주의를 향한 그의 긴 여정은 끝났지만, 그의 삶과 말은 앞으로도 오래도록 인용될 인류의 정신적 유산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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