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 역사와문화]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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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02-05 10:42 조회4,228회 댓글0건본문
Ⅰ. 신라시대: 오대산
개산과 월정사 창건의 연원
3. 신효거사의 월정사 중창
『삼국유사』 탑상 제4,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衆\)」편에는신의두타 이전에 신효거사(信孝居士)라는 인물이 자장의 움막을 계승하였다고 한다. 민지가 찬한 「효신거사친견오류성중사적(孝信居士親見五類聖衆事跡)」 역시 거의 유사한 내용을 전한다.
절 안에 전해 오는 고기(古記)를 상고하여 보면 이렇게 말한다. 자장법사(慈藏法師)는 오대산(五臺山)에 처음 이르러 진신(眞身)을 보려고 산기슭에
모옥(茅屋)을 짓고 살았으나, 7일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묘범산(妙梵山)으로 가서 정암사(淨巖寺)를 세웠다. 그 뒤에 신효거사(信孝居士)라는 이가
있었는데 혹은 유동보살(幼童菩薩)의 화신(化身)이라고도 했는데 그의 집은 공주(公州)에 있고 효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했다. 어머니는 고기가 아니면
먹지 않으므로 거사는 고기를 구하려고 산과 들을 돌아다니다가 길에서 학(鶴) 다섯 마리를 보고 활로 쏘나, 학 한 마리가 날개의 깃 한 조각을
떨어뜨리고 갔다. 거사는 그것을 집어 그것으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았더니 사람이 모두 짐승으로 보였다. 이에 고기는 얻지 못하고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서 어머니께 바쳤다.
그 후에 그는 승려가 되어 자기 집을 내놓아 절을 만들었는데 지금의 효가원(孝家院)이다. 거사는 경주(慶州) 경계로부터 하솔(河率)에 이르러 깃으로눈을
가리고 사람을 보니 사람들이 모두 사람의 모양으로 보이므로 그곳에살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길에서 늙은
부인을 보고, 살 만한 곳을 물었더니 그 부인이 말했다. “서쪽
고개를 넘으면 북쪽으로 향한 골짜기가 있는데 거기가 살 만합니다.” 말을 마치자 보이지 않았다.
거사는 이것이 관음보살(觀音菩薩)의 가르침인
것을 알고, 곧 성오평(省烏坪)을 지나서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처음 모옥(茅屋)을 지은 곳으로 들어가 살았다. 이윽고
승려 다섯 명이 오더니 말한다.
“그대가 가지고 온 가사(袈裟) 한 폭은 지금 어디 있는가.”
거사가 영문을 몰라 하자 승려가 또 말하였다.
“그대가 집어서 눈을 가리고 사람을 본 그 학의 깃이 바로 가사이다.”
거사가 그 깃을 내주자, 중은 그 깃을 가사의 뚫어진 폭 속에 갖다
대니 서로 꼭 맞았는데, 그것은 깃이 아니고 베였다. 거사는
다섯 승려와 작별하고나서야 비로소 이들이 다섯 성중(聖衆)의 화신(化身)임을 알았다.
이 월정사는 처음에 자장법사가 모옥을 지었으며, 그 다음에는 신효거사(信孝居士)가 와서 살았고, 그 다음에는
범일(梵日)의 제자인 신의두타(信義頭陀)가 와서 암자를 세우고 살았으며 뒤에 또 수다사(水多寺) 장로(長老) 유연(有緣)이 와서 살았다. 이로부터 점점 큰 절을 이루었다. 절의 다섯 성중(聖衆)과 9층으로 된 석탑(石塔)은 모두 성자(聖}者)의 자취이다.
상지자(相地者)가 말했다.
“나라 안의 명산(名山) 중에서도 이곳이
가장 좋은 곳이니 불법(佛法)이 길이 번창할 곳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眾)」조>
이 기록은 자장
이후, 공주(公州) 출신의 신효거사가
관음보살의 가르침에 따라 오대산에 들어와 자장이 머물던 움막에 살았으며, 오류성중의 화신을 월정사에서
친견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자장과 신효에 대한 이러한 이야기는 오대산이 불교와 인연이 깊은 곳이라는 불연국토사상(佛緣國土思想)을 배경으로 한다. 자장이
오대산에 들어온 계기는 문수보살의 가르침이었고, 신효는 관음보살의 인도로 자장이 살던 움막을 찾았다. 불교가 전래된 후 고대인들은 우리나라가 일찍이부처님과 깊은 인연이 있는 곳이라는 불연국토, 혹은 성적승지(聖跡勝地) 신앙을 형성해왔다. 자장과 신효의 월정사 창건에 관한 이야기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그러나 자장과 신효 시절의 월정사는 아직 이름조차도 없었던 그야말로 움막 수행처의 모습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 기록은 전한다. 그렇다면 성덕왕 시대에 조영되었을 하원과 월정사는 서로 다른 사찰이었을가능성 역시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오대산의 육사와 함께 하원이 건립된 시기가 8세기 초였고, 또 신효거사의 월정사 정착 시기를 세기 초중반 이후로
본다면, 또 하원이 대산 성지 신앙의 중심 사찰이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그 성쇠를 단정할 수 없기
때문에, 하원과 월정사가 다른 사찰이라고도 확언하기는 어렵다. 곧
기록상으로만 본다면, 성덕왕대의 하원과 자장 혹은 신효 시절의 월정사는 다른 사찰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된다. 다만 하원의 입지를 생각한다면, 하원의 터와 월정사
터가 겹칠 가능성도 없지 않은 것이다.
기록의 내용을
검토해보면, 크게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는 신효거사의
연대인데, 범일국사(梵日, 810~889)의 제자인 신의두타보다는 앞선 시대의 인물이었다는 점이다.3 둘째는
일연이 앞의 「명주(溟州) 오대산 보질도태자전기(五臺山 寶叱徒太子傳記)」와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眾)」을 기록한 태도로 미루어볼 때, 일연은 오대와 월정사의 성지신앙이
형성되는 과정을 각기 다른 연원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추정이 가능하다. 곧 일연의 기록은
「보질도태자전기」를 통해서 오대성지신앙이 정착되는 과정을,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眾)」을 통해서 그 오대성지신앙의 또 다른 중심지로 월정사가 부상하는
과정을 기록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곧 「대산월정사오류성중(臺山月精寺五類聖眾)」은 월정사의 사세가 차츰 확대되어 가면서 월정사가 오대산 산문 전체의 중심이 되는 과정을, 신효거사의 오류성적 친견이라는 사건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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