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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환수보고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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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02-19 18:12 조회4,54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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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암 사건과

‘조선왕조실록환수위’의 구성



경기도 수락산 자락에 위치한 내원암은 봉선사의 말사로 현재 비구니스님(주지 재문스님)들이 주석하고 계신 곳이다. 2005년 이 조용한 산사는 친일파 이해창의 후손 21명이 내원암 경내지 4만 8천평을 도려 다라며 소송을 제기, 뜻밖의 송사에 휘말렸다.

봉선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25교구 본사로서 이 사건에 관한 대응을 모색, ‘친일파의 재산권 보호는 위헌’ 이라는 취지의 ‘위헌법률심판’으로 맞서 사회의 주목을 받았다.

여론이 불리해지자 친일파 후손들은 ‘소취하서’를 법원에 제출, 피고에게 즉 내원암과 봉선사에 ‘소취하의’ 동의를 구했다.

< 경기도 남양주시 내원암 >

< 기자회견 - 친일반민족 행위자의 재산권 보호는 위헌이란 취지의 기자회견에서 철안스님이 발언하고 있다. 조계종 한국불교 역사문화기념관 (오른쪽으로부터 조문기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봉선사 주지 철안스님, 국회의원 최용규, 조계종 기획실장 법안스님, 봉선사 총무국장 선우스님, 조계종 중앙신도회 손안식 부회장) >

그러나 봉선사는 ‘항일 운동가인 운허스님의 정신이 서린 봉선사가 친일파 후손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결정을 내린 뒤, 현행법상 패소의 가능성이 크더라도 전민족에게 ‘친일파 후손의 땅찾기’ 가 지닌 문제점을 폭로하기 위해 소취하의 요구를 거부, 정면승부를 걸기로 했다.

그러자 친일파 후손들이 ‘봉선사’로 사과 방문하며 소취하에 동의, 조용한 해결을 부탁했으나 봉선사는 “지금은 관음보살의 부드러운 자비보다 선사스님의 엄중한 죽비경책이 필오한 때”라며, 강경하고 엄격한 원칙을 고수했고, 조계종 중앙신도회, 민족문제연구소 등과 힘을 합쳐 “친일정산과 민족정기 확립을 위한 조계사 촛불집회”를 열기로 했다.

이렇게 되자 친일파 후손은 땅찾기의 문제점이 사회 각층에 보도 되었고, 조계사 집회역시 3000명의 대중이 운집한 가운데 성황리에 봉행, ‘친일파 재산 환수특별법’ 이 통과될 수 있도록 여론의 힘을 모아 주었다. ‘내 원 암 사 건’ 자체도 2005년 12월 30일 서울 중앙 지법에서 승소함으로ㅆ, ‘친일파 땅찾기’를 영원히 종식시키는 선두적 역할을 해낸 것이다. 내원암 사건의 선봉에 섰던 봉선사 혜문스님과 함께 힘을 모아 싸워던 사람들은 내원암 사건이 ‘친일파 재산찾기 저지’ 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좀더 의미있는 운동체로 발전하기를 희망했다. 내원암 사건의 승리를 자축하는 자리에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본’ 의 설명을 듣게 되었고, 모두 흔쾌히 동의함으로써, 결국 내원암의 승리는 ‘조선왕조실록환수위’ 의 태동으로 이어지게 되었던 것이다.

< 조계사 촛불집회 - 친일파 재산권 보호는 위헌이란구호를 외치는 대중들. (위) 노회찬의원에게 친일파 재산환수법 통과를 당부하며 점등하고 있는 혜문스님(아래) >

환수운동의 방향설정과

월정사의 동참

1년에 걸친 자료조사와 ‘조직구성’은 대체로 마무리가 되었지만, 정작 중요한 문제는 어떻게 환수해 올 것인가에 대한 방법론이었다. ‘조선왕조실록환수위’ 의 활동 방햐에 대한 첫 번째 모임은 2006년 설날 봉선사에 서 이루어 졌다. 봉선사에서 동안거를 보내고 있던 혜문스님을 구리의 송영한 기자가 방문, 구체적인 활동 계획과 방향성을 논의 했다. 여기서 혜문스님과 송영한 기자는 일본 정부와 도쿄대를 상대로 정면승부를 던져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고, 월정사를 원고로 한 민사소송을 제기하기로 방향을 설정했다.

< 밀부와 밀부 주머니 - 밀부 조선정부는 월정사 주지를 ‘실록수호총섭’ 으로 임명한 뒤, 유사시 군대를 동원 ‘실록’ 을 보호할 수 있도록 했다. 밀부는 군대를 동원할 때 사용하는 일종의 ‘신표(信標) 이다. 월정사 성보 박물관 소장 >

우리정부는 1965년 한일협정 당시 1,432점의 문화재를 반환 받으면서, ‘문화재 반환에 대해 청구권을 포기’ 한 상태였기 때문에, 더 이상의 반환 요구를 일본 정부에 할 수 없었다. 물론 당시의 청구 품목에는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은 빠져 있었다. 따라서 정부가 아닌 민간차원에서 문제를 제기해야 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약탈 당시까지도 ‘조선왕조실록’ 을 보관 관리하고 있었던 월정사의 도움이 절실했다. 오대산 월정사 주지는 조선 선조 연간 ‘오대산 사고’ 가 설치된 이래, ‘실록수호총섭’ 의 지위를 갖고, ‘오대산 사고’ 를 수호하고 관리해 왔기 때문이다.

< 오대산 사고 - 오대산 사고에서 ‘조선실록 반환운동’ 을 취재 중인 MBC 이필희 기자 >

때마침 봉선사를 방문한 월정사 재무국장 법상스님과의 만남을 통해 이런 내용을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께 전달할 수 있었다. 월정사 주지스님은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의 관리 점유권자로써, 일본 정부와 도쿄대 총장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소송당사자의 능력’ 을 갖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이런 전후 사정을 듣고 월정사 주지 정념스님은 실록 반환운동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을 피력했고, 재정적 지원까지도 맡아 주시기로 했다. 따라서 봉선사와 월정사 주지스님들께서 공동의장을 역임하고, 혜문스님(봉선사)과 법상스님(월정사 재무국장) 이 간사를 맡아 실무를 진행하는 ‘조선왕조실록환수위’ 의 윤곽이 잡히게 되었다. 사건 진행의 주요한 실마리가 해결되고 ‘조선왕조실록환수위’ 의 구체적 활동계획이 마련되자 언론의 도움이 필요했다. 마침 경기 북부 주재원으로 있던 MBC 이필희 기자에게 그간의 진행경과를 말하자, 흔쾌히 취재에 응해 주었다. 2006년 2월 16일 9시 뉴스데스크와 한겨레신문 등에 ‘조선왕조실록환수위’ 의 구성과 ‘조선왕조실록 반환운동’ 이 대대적으로 보도 되었다. ‘조선왕조실록 환수’ 를 위한 대장정의 서막이 열리게 된 것이다.

< MBC취재팀 - 월정사에서 MBC 취재팀과 함께(오른쪽부터 서영호 부장님, 혜문스님, 이필희 기자) >

< 오대산 사고 등록 - 오대산 사고의 관리와 운영에 대한 일종의 행정지침 공문서이다. 여기에 월정사 주지를 수호총섭에 임명한 내용, 사고(史庫)와 실록을 보관 관리하는 규정 등이 수록되어 있다. 월정사 성보 박물관 소장 >




‘소장의 작성’ 과 재일동포

김순식 변호사와의 만남

도쿄대와의 소송을 통한 실록 환수로 방향을 설정한 뒤, 일단 문화재청에 도쿄대의 실록 소장 사실에 대한 확인을 구하기로 했다. 일본 법원에 제출할 소장을 작성하기 위해 ‘사실확인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에서는 도쿄대의 실록 소장 사실을 공식적으로 확인한 적이 없었다. 국립문화재 연구소가 해외소재 한국문화재에 대한 자료수집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었지만, 도쿄대학에 대해서는 그때까지만 해도 공식적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문화재청은 혜문스님의 정보공개 청구에 대해, 배현숙 교수의 저서를 인용해 ‘46책이 소장되어 있다’며 공식 답변을 해 주었다.

< 김순식 변호사와의 만남 >

혜문스님은 법무법인 덕수의 송상교 변호사(내원암 사건의 담당 변호사), 조계종의 김형남 변호사, 법무법인 해미르의 서현 변호사 등의 법률검토를 받으며, 그동안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도쿄 지방재판소에 제출할 ‘소장’과 일본정부에 전달 할 ‘반환요청서’를 작성하고, 일본어로 번역까지 마쳤다.

그러나 문제는 일본에서 직접 소송을 진행할 변호사를 구하는 것이었다. 혜문스님은 여러방면을 통해 일본 변호사를 수소문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환수위’의 문만기 실행위원장을 통해 한명, 내원암 사건을 담당해 주셨던 송상교 변호사를 통해 한명, 총 두명의 변호사를 추천받은 뒤, 2006. 2. 26일 혜문스님은 일본으로 출국했다. 일본 도쿄 사정과 일본어에 능숙한 임곤택(고려대 국문과 석사과정)씨가 동행했다.

문만기 위원장이 추천한 변호사는 ‘변호사선임’을 거절했다. 승소할 자신이 없고, 현실적으로 불가능 하다는 입장이었다.

< 정보공개청구서와 내용 >

한일협정으로 문화재의 반환문제와 청구권이 소멸한 마당에 ‘소송을 제기’하거나 ‘반환운동’을 전개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이었다. 상대가 도쿄대라는 것도 부담스러워 하는 눈치였다. 게다가 도쿄에 있는 변호사 중에 이 사건을 맡을 변호사를 찾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담긴 조언까지 곁들였다.

그러나 송상교 변호사가 추천해 주었던 김순식 변호사의 입장은 달랐다. 김순식 변호사는 도쿄 도지사 이시하라의 ‘조선학교 폐쇄조치’에 맞서 조총련계 학교인 ‘에다가와 학교’ 지키기에 앞장선 사회운동가이기도 했다.

김순식 변호사는 현행법상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 하지만, ‘식민지 지배에 대한 과거사 청산’을 요구하는 입장에서, 사회운동의 차원에서 함께 힘을 합치자고 변호사 선임을 수락했다. 또한 본인의 후배인 이춘희 변호사도 소개하며, 앞으로 재일조선인 문제를 함께 풀어가야 할 사람이라며, ‘실록반환운동’에 이춘희 변호사도 함께 동참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전달했다. 김순식, 이춘희 변호사가 변호사 선임을 수락함으로써, ‘조선왕조실록환수위’는 조직구성을 완성, 본격적인 반환운동에 착수하게 되었다.

MBC시사매거진 백승규

기자의 ‘조선왕조실록’ 촬영



< 시사매거진 2580 - 비운의 왕조실록 >

변호사 선임을 위해 도쿄에 머물고 있을 때, MBC 백승규 기자와 계명문화대의 배현숙 교수도 도쿄로 건너왔다. ‘조선왕조실록환수위’의 출범식과 기자회견과 시간을 맞춰, 시사매거진 2580에서도 ‘비운의 왕조실록’이란 주제를 취재하고 있었다. 백승규 기자는 ‘조선왕조실록’ 반환운동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취재 활동에 임해 주었다.

2580은 도쿄대를 설득, 도쿄대가 소장하고 있는 실록의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취재 요청을 계속 하고 있었다.

당시가지 ‘환수위’도 실록을 직접 육안으로 확인한 것은 아니었고, 사진 자료를 가지고 있던 것도 아니었다. 실록의 촬영에 성공한다면 국내 여론에 반향을 불러 일으키기에 충분했으므로, 우리는 모두 마음속으로 간절하고 초조하게 도쿄대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었다. 도쿄대는 ‘매우 난처하다’는 입장을 거듭 밝혔지만, 백승규 기자의 집요한 설득에 결국 촬영을 허가하고 도서관 사무부장 사사카와가 인터뷰에 응했다.

시사매거진 2580의 취재 성공은 많은 파장을 일으켰다. 93년 동안 도쿄대 지하 귀중서고에서 미공개 되었던 실록이 방송됨으로써, 국내 언론들과 시청자들이 ‘실록반환운동’에 눈길을 돌리기 시작했고, 도쿄대 측에서도 많은 심리적 압박을 느꼈을 것이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은 이렇게 이국땅에서 긴 잠을 깨고 우리 민족의 곁으로 서서히 다가왔다.

< 도쿄에서 백승규 기자, 배현숙 교수님과 함께 >

<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 - 배현숙 교수 제공 (오른쪽에서 도쿄제국대장 서인이 보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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