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정사 역사와문화]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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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02-05 13:55 조회4,458회 댓글0건본문
Ⅲ. 조선시대; 질곡을 넘어 역사와 신앙을 품었던 불교성지
1. 조선전기의 오대산 불교(1)- 나옹문도와 오대산 불교의 중흥
억불숭유의 조선시대를 당하여
오대산과 월정사는 역사 속에 부침을 거듭하게 된다. 다행히 상원사가 세조의 원당으로서 보호받고, 임진왜란이후에는 오대산에 사고가 설치되면서 부분적으로나마 시대의 질곡을 피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조선시대의 오대산 불교는 크게 세 차례의 전기를 맞이하였다. 첫
번째는 조선초기 나옹 문도가 대거 오대산에 주석하였던 것이고, 두 번째는 세조가 상원사를 원당으로 삼음에
따라 왕실사원으로서의 입지를 가지게 되었던 것이고, 세 번째는 조선중기에 사명유정과 청허휴정의 문도들이
대거 오대산과 인연을 맺고, 그것을 계기로 임진왜란 이후에 오대산에 사고(史庫)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1. 조선전기의 오대산 불교(1)- 나옹문도와 오대산 불교의 중흥
오대산의 진신신앙은 억불숭유
정책을 내세웠던 조선시대에도 지속 되었다. 조선은 새로운 왕조의 사회적·경제적 기반을 수립하기 위해 불교를 배척하였다. 고려시대까지 국가불교라고
할 만큼 번성을 누리던 불교는 중기 이후 지나치게 세속화되어 사찰은 많은 토지와 노비를 거느렸다.
막강한 경제력을 바탕으로
승려는 정치권력에 깊게 관여하였고, 마침내고려 말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척결의 대상으로 지목받았다. 이들에 의해 신왕조 조선이 건국되면서 결국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조선은 건국 초부터
불교를 배척한 것은 아니었다. 천년을 이어온 사상과 신앙, 그리고
문화의 전통을 일시에 제거할 수는 없었다. 특히조선의 건국과정에 무학대사(無學大師) 등의 승려가 참여하여 공을 세우는 등 불교계의 도움이 적지 않았다. 이에
따라 태조 이성계를 비롯하여 태종·세종·세조 등은 정치적으로는
배불시책을 단행하면서도 왕실의 개인적 신불활동을 계속하였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초기의 오대산 불교는
국왕의 신불(信佛) 활동으로 오히려 전시대보다 활기차게 전개되었다.
조선초기 오대산 불교의
중심은 상원사였다. 1401년(태종 1) 봄 태종은 상원사의 사자암을 중건하여 원찰로 삼았다. 10월에는
상원사에서 고려왕실의 영혼을 위로하는 수륙재를 열도록 하였다. 그 해
11월 태종은 사자암에 친히 행차하여 성대한 낙성식을 베풀었다. 이후 세조는 오대산 계곡에서
문수동자를 만나 괴질(怪疾)을 치료받고, 고양이에 의해
자객의 습격을 피하는 등의 불은(佛恩)을 입었던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세조는 1465년(세조 11) 신미(信眉)와 학열(學悅)대사에게 상원사를 중창하도록 하여 역시 원찰로 삼았다. 왕실의 원찰로서 상원사의 번성은 예종대(1468∼1469)에도 계속되었고, 이처럼 상원사를 중심으로 오대산의 불교는 계속되었다.
상원사는 조선초기부터 왕실의
원찰이 되어 사격이 높아갔지만, 이 무렵의 월정사 역사는 의외로 전하는 사실이 많지 않다. 오히려 오대산의 산내 암자들을 중창하는 등 월정사보다는 산내의 불교가 활발해지고 있다.권근의 문집인 『양촌집』에 남아 전하는 사자암과 관음암, 수정암의
중창기는 그러한 분위기를 보여준다.
건문(建文) 3년(1401년) 봄 정월 신미일(辛未日)에 계운신무 태상왕 전하(啓運神武太上王殿下 조선 태조)께서 내신(內臣)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 이득분(李得芬)을 시켜 참찬 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 신(臣) 권근(權近)을 명소(命召)하여 전지(傳旨)하기를,
“내가 일찍이 듣건대, 강릉부(江陵府)의 오대산(五臺山)은 빼어난 경치가 예로부터 드러났다기에, 원찰(願刹 왕실의 명복(命福)을 빌기 위해 세운 절)을
설치하여 승과(勝果)를 심으려 한 지 오래였다. 지난해
여름에 늙은 승려 운설악(雲雪岳)이 이 산에서 와서 고하기를 ‘산의
중대(中臺)에 사자암이란 암자가 있었는데 국가를 보비(補裨)하던 사찰입니다. 대(臺)의 양지쪽에 자리잡고 있어 이 대를 오르내리는 사람들이 모두 거쳐가는
곳입니다. 세운 지 오래되어 없어졌으나 빈터는 아직도 남아 있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한탄하고 상심하니, 만약 이 암자를 다시 세운다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기뻐하고 경축(慶祝)함이 반드시 다른 곳보다 배나 더할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듣고 기뻐하여 공장(工匠)을 보내어 새로 세우되, 위에 3채를 세운 것은 부처님을 안치(安置)하고 승방(僧房)으로 쓰기 위한 것이요, 아래 2칸을 세운 것은 문간과 세각(洗閣)으로 쓰기 위한 것인데, 비록
규모가 작기는 하나 형세에 합당하게 되었으니, 알맞게 하고자 하여 사치하거나 크게 하지 않은 것이다. 공사가 이미 끝나매 겨울 11월에 친림(親臨)하여 보고 낙성(落成)을 하였으니, 대개 먼저
간 사람들의 명복을 빌고 복리(福利)를 후세에 미루어 물아(物我 외물과 나)가 다같이 받고 유명(幽明)이 함께 힘입으려 한것이니, 경(卿)은 글을 지어 영구히 보이도록 하라.” 하였다.
신 권근이 그윽이 생각하건대, 불씨(佛氏)의 도(道)는 자비로 만물을 구제하는 것인데, 그
설이 매우 근거가 있어 한(漢) 나라 이래로 당시의 군주들이 존숭하여 믿지 않은 이가 없었다.
삼가 생각하건대, 우리 태상왕
전하께서 신무(神武)하신 자품으로 천운에맞추어 나라를 창건하여 곧 동방(東方)을 차지하시고, 유신(維新)의 정사를펴, 깊은 인(仁)과 후한 은택으로 계책을 남기어 후손들을 복되게 하심이 지극하였다고 하겠다. 온갖
정사[萬機]가 번거로움이 싫으셔서 성왕(聖王)에게 전위(傳位)하시고 불승(佛乘 불교 경전)에 전심(專心)하여 부지런히 받들고 믿어 궁벽한 산의 정상에 이르기까지 옛 암자 터를
물어보아 유명한 절을 세우시고, 머나먼 천리 길을 친히 옥체(玉體)를 수고롭혀 순행(巡行)하여임하시니, 산골의 숲이
광채가 나고 연하(煙霞)가 빛깔이 달라졌으니, 이
산이 생긴 이래 일찍이 있지 않던 일이다.
옛적에 신라(新羅)의 두 왕자(王子)가 이 산에 들어왔던 것이 지금까지 미담(美談)으로 전하여 오고 있는데, 하물며 지금 전하(殿下)께서 창업(創業)하신임금이요 태상왕(太上王)의 존귀하신 몸으로 이곳까지 멀리 승여(乘輿)를 몰아 친히 임행(臨幸)하셨음에랴. 이제부터는 산야(山野)의 늙은이들이 한없이재미나게 이야기하여 이 산의 중요함을 증가하게 될 것이니, 마땅히
헌원씨(軒轅氏)가 패자(貝茨)에서 노닌 것이나, 목왕(穆王)이 요지(瑤池)에 간 것과더불어 짝이 되어 다같이 한이 없이 후세에 전하여 일컫게
될 것이다.
<『양촌선생문집』13, 「오대산 사자암
중창기(五臺山獅子庵重創記)」>
중대 사자암의 중창은 권근의
중창기에 의하면, 운설악이란 승려의 청과 원찰을 삼고자 하는 조선 태조의 생각이 맞물리면서 이루어진
불사임을 보여준다. 사실 조선 태조는 고려시대와 마찬가지로 국사와 왕사를 모두 임명했던 불교신자였으므로, 건국초기에 이와 같은 불사가 왕실 혹은 국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그리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도인(道人) 지원(志元)이 일찍이 자신의 힘으로 사우(寺宇)를 경영하여 세운것이 여러 번인데, 매양
우리 종공(宗公) 목은 선생(牧隱先生)의 글을 구하여 기하기를 청하므로, 선생이
그의 근간함을 아름답게 여겨 진중하게 대우했었다. 사(師)가 또한, 우리 가존(家尊 아버지)께서 좋은 일 하기를
즐기시기 때문에 그 비용을 도와 주기를 청하였는데, 우리 가존께서 또한, 그가 근간하고 신중하며 거짓이 없기 때문에, 그의 말을 반드시 들어
주시니, 이로 말미암아 나도 사(師)와 알게 된 지가 오래였다. 일찍이
강릉(江陵) 오대산(五臺山)의 동대(東臺)에 관음암(觀音庵)을 중창하여 일을 끝내고, 나에게
말하기를, “내가 그 전에 절을 중창하게 되면 반드시 목은 선생에게 기(記)를 청하였고 목은께서도 사양하지 않고 써주셨습니다. 지금 관음암을 짓는데,목은께서는 이미 돌아가셨고, 그대는 목은의 문인이니, 사양하지 말고 기를 지어 주시오.”라고 하였다.
내가 이미 승낙하였으나 세상일에 끌리느라 짓지 못한 지 여러 해가 되었더니, 그 동안에 사(師)가 또 불상(佛像)을 만들고 경문(經文)을 인출한 것이 자못 많아, 내가
또한 일찍이 그 인출한 경문 여러 부(部)의 발문[跋]을 지었었다.
건문(建文) 4년(1402년) 여름 5월에 내가 병으로 집에 있었는데, 사가 마침와서 말하기를, “그대가 전에는 바쁜 것 때문에 내가 기(記) 부탁한 것을 사양하고 짓지 않았으나, 오늘날은 한가하게 되었으니 붓을
들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내가 따라서 묻기를, “사가 사미승(沙彌僧) 때부터 여러 지방을돌아다니며 경영하고 권유하여 절을 세우고 불상을 만든
것이 이미 많으니, 마음과 몸이 반드시 곤뢰할 것인데 싫증나지 않는가?”라고
하니,사가 말하기를, “사람이 당초에 정해진 바의 뜻은 그만두려
하여도 되지 않는 것이니, 학문에 뜻한 사람은 반드시 학문에 부지런하고, 선(禪)에 뜻한 사람은 반드시 선을 힘쓰는 것입니다. 내가 젊었을 때 뜻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시험삼아 한 것인데, 그
뒤부터는 뜻이 언제나 여기에 있어서 분주하게 경영하면서도 피로함을 느끼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늙어서 다시는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내가 처음에 한 일들은 다행히도 목은선생에게 부탁하여 소멸되지
않게 되었거니와, 내가 나중에 한 일은 그대가 혹시라도 소멸되지 않도록 하여 주기 바랍니다.”고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아, 사람이 누군들 처음 먹은 마음이 없겠는가마는, 그러나 변함없이 부지런히
함으로써 성공하게 된 사람은 드물다. 사(師)가 젊었을 때 먹은 마음을 중간에 변하지 아니하여 성취하는 바가 많았으되, 평생토록 부지런하고 늙어서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그 부지런함이
지극하다고 하겠다. 이 암자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사가 뜻한 바를 변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마침내 성공하였음을
알게 된다면, 그 중 좌선(坐禪) 공부하는 사람은 더욱더 정진(精進)하여 반드시 얻는 바가 있을 것이요,
일을 관장하는 사람은 언제나 더 수리하여 영구히 폐추(廢墜)하지 않게 될 것이다. 산의
기이한 경치와 암자의 제도 같은 것은 내가 보지 못한 것이니, 이는 구경하는.
사람들 자신이 알아보기에 달린 것이다.
낙성한 시기는 아무 해 아무 달이었고, 그 비용을 도운 단가(檀家)는 우리 가군(家君) 및 아무 고을 아무 아무이다.” 하였다.
<『양촌선생문집』14, 「오대산 관음암
중창기(五臺山觀音庵重創記)」>
이 동대 관음암 중창기는 승려 지원의 노력에 의해 동대 관음암을 중창했다는
기록을 담고 있다. 역시 조선 초 건국 직후에 해당하는 시기여서 억불의 기조가 아직은 드세지 않았던
시기임을 고려하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비슷한 시기에 산내의 많은 암자들이 중창불사를
하고 있음은 주목된다.
강원도의 경계에 큰 산이 있는데 다섯 봉우리가 함께 우뚝하다. 크고 작기가 비슷하면서 고리처럼 벌렸는데, 세상에서는 오대산(五臺山)이라고 부른다. 봉우리의 가운데 것은 지로(地爐), 동쪽은 만월(滿月), 남쪽은 기린(麒麟),서쪽은 장령(長嶺)이라 하며, 북쪽은 상왕(象王)이라 한다. 드디어 오류 성중(五類聖衆)이 항상 머문다는 말이 있고 불가에서 성대히 칭송하지만, 우리 유가에서는 증거할 것이 없으므로 자세하게 적지 않는다.
서쪽의 누대 아래에 함천(檻泉)이 솟아나는데 빛과 맛이 보통 물보다 낫고 물 무게도 또한 그러하다. 그 물을 우통수(于筒水)라고 하며 서쪽으로 수백리를 흘러서 한강(漢江)이 되고, 바다로 들어간다. 한강이
비록 여러 곳에서흐르는 물을 받아 모인 곳이나, 우통수가 중령(中泠)이 되며 빛과 맛이 변하지 않아서 중국에 양자강(楊子江)이 있는 것과 같으며, 한강이라는 명칭도이 때문이다.
우통물 근원 되는 곳에 수정(水精)이라는 암자가 있는데 옛날 신라의 두 왕자가 여기에 도망 와서 선(禪)을 닦아 도를 깨닫자, 지금도 승려로서 증과(證果)를 닦고자 하는 자는 모두 여기에 있기를 즐겨하는데, 임신년 가을에
화재가 있었다. 그때에 조계운(曺溪韻)의 승 나암 유공(懶庵游公) 목암 영공(牧庵永公)이 모두 명리를 버리고 이 산에 들어와 있었는데, 그 서까래들이 잿더미가 되는 것을 목격하고 슬피여기며 탄식하여 중건하고자 하였다.
이에, 권선문(勸善文)을 가지고 산에서 나가 널리 권하니, 작고한 시중 철성이림(鐵城李琳)공은 그의 아내 홍씨(洪氏)와 함께, 중추 고흥 유운(中樞高興柳雲)공은 그의 아내 이씨(李氏)와 함께 시주하였고, 여러
단가(檀家)에서도이 소식을 듣고 모두 기꺼이 각자 돈과 곡식을 시주하였다. 계유년 봄에 공사를 시작할 참인데, 다시 함천(檻泉) 옆 숲 아래에 가서 지세를 살피니 더욱 기이하고 훌륭하였다. 이에 나무를
베어 내고 흙을 깎으니, 옛날의 주춧돌이 그대로 남았는데, 완연한
절터였다. 보던 자가 서로 경하하며 다 함께 말 하기를, “하늘이
화재를 나게하여 그 누추한 곳을 태우고 더 나은 곳을 계시한 것인가, 두 왕자가 재생하여 그 옛 터를
발견하게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도안(道眼)이 이미 갖추어져서 저절로 옛 사람과 묵묵히 합한것인가. 이 세 가지 중에 반드시 하나일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이에 공사에 기꺼이 부역하여 절을 다시 세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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