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 환수보고서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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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02-20 13:10 조회4,468회 댓글0건본문
도쿄대가 서울대로
기증하기까지의 과정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국내로 돌아오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나 서울대의 입장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3차 회담 과정에서 드러난 서울대의 행동은 다소 비겁한 면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도쿄대가 3차 회담과 기자회견을 통해 발표한 기증결정 과정을 보면, 다소 놀라운 면이 눈에 띄었다.
우선 도쿄대는 5월 10일 긴급이사회를 개최하여 ‘기증을 결정’ 한 뒤, 5월 15일 서울대에 도쿄대 부총장이 직접 방문 ‘기증할 테니까 받아줄 수 있겠느냐’는 제의를 먼저 했다. 서울대나 다른 단체의 반환요청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 편지와 답신 - 좌_도쿄대의 편지, 우_서울대의 답신 >
또한 5월 29일 최종적으로 서울대로부터 기증사실을 수용하는 편지를 접했으므로 5월 31일 기자회견을 갖게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2주만에 전격적으로 결정되었던 것을 시인했다.
환수위가 5월 10일날까지 반환의사를 분명히 피력하지 않으면, 소송을 제가하겠다는 방침이 도쿄대측에 많은 심리적 압박을 주었던 것이다. 사실 서울대 대학원장은 환수위가 일본으로 출국하던 5월 30일 오전, 구체적인 언급은 없이 저녁때 만나서 ‘조선왕조실록’ 문제로 저녁때 만나고를 싶다고 봉선사로 연락을 해왔었다. 환수위 실무자들이 일본에 도착한 때, 환수위 공동의장 철안스님, 정념스님은 서울에서 서울대 측과 회담을 했다. 서울대는 비공식적이지만 환수위측 덕분에 서울대가 실록을 기증받게 되었다며, 감사를 표한 뒤 미리 알리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정중히 사과했다. 그러나 서울대는 5월 31일 기자회견장에서 ‘환수위’의 노력은 애써 축소하고, 실록 기증은 ‘외규장각 반환운동을 전개해 왔던 서울대의 노력의 결과’라며 말도 안되는 논리를 폈다. 환수위는 일제에 의해 약탈당한 문화재를 ‘기증’ 받는 것의 문제점의 지적하며, 5월 31일 현지에서 즉각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러나 아직 실록이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서울대를 비판하는 것은 국민적 경사를 퇴색시킬 수 있다는 판단 하에 실록의 반환 때까지 부정적 논의는 자제하기로 의견을 통일했다.
< 보도자료 -서울대가 배포한 보도자료 >
도쿄대에서 온 편지
국립서울대학교 정운찬 총장 귀하
신록의 계절, 귀하께서 날로 건승하시길 바라며 삼가 아룁니다.
아시다시피 서울대학교는 올해 창립 60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서울대학교가 고난의 길을 극복하고 발전을 이룩하여 세계 일류 대학이 된 것에 대해서 경의를 표하는 동시에 마음으로부터 축하드립니다. 도쿄대학은 서울대학교와 1990년에 학술교류협정을 체결하고, 이후 많은 교류 실적을 쌓아오고 있습니다. 동아시아 연구형 4대학 연합에서도 강한 협력관계에 있습니다. 금후에도 각각의 나라를 대표하는 대학동지로서 상호 교육연구의 발전에 이바지해야 하고, 긴밀한 학술교류를 진행하고 싶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최근에 들어 나는 도쿄대학 종합도서관이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의 일부를 소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들은 바에 따르면, 이 『조선왕조실록』은 1913년에 도쿄대학으로 가져왔고, 1923년에 관동 대지진으로 대부분이 소실되었지만 타다 남은 47책이 귀중서로서 소중하게 보관되어 왔다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는 같은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 중의 27책이 서울대학교의 규장각에 소장되어 국보로 지정되었음을 알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전부터 신중히 검토한 결과, 저는 서울대학교의 창립 60주년과 규장각 창립 230주년을 축하하고, 도쿄대학과 서울대학교의 학술교류를 추진하기 위해, 도쿄대학이 소장한 오대산본 『조선왕조실록』을 서울대학교에 증여 할 결심을 했습니다. 장기간 떨어져 있던 도쿄대학 소장의 『조선왕조실록』과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의 『조선왕조실록』이 일체로 되는 것이야말로, 도쿄대학과 서울대학교의 학술교류를 더욱 밀접하게 함에 있어 최선의 방법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정운찬 총장께서는 저의 미의(微意-변변치 못한 작은 성의)를 이해하시고 받아주시면 다행입니다.
서울대학교의 더 나은 발전을 기원하고 도쿄대학과 서울대학교의 학술교류가 더욱더 밀접의 도를 증진시키기를 희망합니다.
평성 18년(2006년) 5월 15일
도쿄대학총장 小宮山 宏(고미야마 히로시)
문화재청장의 조정
세종클럽 간담회
서울대는 ‘환수위’ 측이 귀국한 후, 서울대 기증방식의 문제점을 지적하자 그제서야 실록환수의 실질적 공로는 ‘환수위’에 있다며 감사를 표했다. 국내여론도 수수방관하던 서울대가 마치 환수의 주역인양 행세하는 것에 대한 반발이 거세었다.
문화재청은 ‘환수위’의 운동과정을 잘 알고 있었고, 실록 소장처에 대한 의견도 조율할 겸 6월 27일 여의도 세종클럽에서 간담회를 개최했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주선으로 열린 이날 간담회에서, 환수위와 서울대측은 다음과 같은 사항을 합의했다.
< 세종클럽 간담회 >
1. 조선왕조실록 환수화 관련 문화재청과 서울대는 ‘환수위의 노력’ 에 감사한다.
2. 반환된 실록은 원칙적으로 국유재산으로 한다.
3. 소장처는 문화재청장이 결정한다.
4. 반환후 국민환영식은 오대산 월정사에서 한다.
서울대학 총장에 드리는 공개 질의서
1.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이 도쿄대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는 올해 3월 반환운동을 전개 하겠다고 공식 출범식을 가졌습니다. 불교계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반환운동의 결과 도쿄대는 지난 5월 31일 서울대에 기증의사를 밝혔습니다. 반환운동의 과정에서 기증받기로 한 서울대는 어떤 역할을 했습니까?
2. 서울대가 도쿄대로부터 기증의사를 전달받은 것은 5월 15일이고, 기증을 수락하겠다는 공문을 전달한 것은 5월 29일로 확인되었습니다. 서울대는 어떤 이유로 환수위측에게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았습니까?
3. 실록의 반환운동에 대해 서울대 규장각을 비롯한 많은 기관들은, “약탈경위가 불분명하다” “법적 근거가 없다” 는 등 회의적 의견을 제기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은 조선왕조실록환수위원회에 의해 원 소장처, 약탈의 경위, 도쿄대 소장목록 등이 이미 완벽하게 밝혀져 있었고, 이것은 어쩌면 약탈의 경위와 불법성을 입증해서 소송이 성립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사례였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도쿄대가 서둘러 서울대 기증을 발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우린 약탈당한 문화재를 공식적으로 반환 받을 수 있는 가장 좋은 사례를 서울대가 성급하게 기증받음으로써 놓쳐 버렸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서울대의 기증수용이 다른 문화재 반환운동에 영향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앞으로의 환수운동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이 점을 서울대 총장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도쿄대의 서울대 기증에 대해, 결국 자기 물건을 남에게 기증받는 해프닝이란 지적이 있습니다. 더구나 실록은 도자기와 같은 공예품의 차원을 넘어 민족역사의 기록이란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서울대와 같은 국가기관이 허겁지겁 자기 민족의 역사를 남의 나라로부터 기증받는 것은 역사의식의 부재란 평가에 대해 서울대의 입장은 어떻습니까?
5. 도쿄대는 ‘기증’ 서울대는 ‘반환’ 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했다고 합니다. 반환이란 주인이나 연고권이 있는 사람에게 되돌려 주는 것을 의미하는데, 서울대는 무슨 자격으로 실록을 반환받는 것입니까? 반환이란 의미가 성립하려면, 약탈당시 실록의 소유권자인 국가나 점유 관리해 온 월정사가 받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6. 서울대에서 주장하는 1907년 칙령과 1911년 조선총독부 취조국의 조치로 ‘월정사는 관리권’이 없다는 주장은 문제가 있습니다. 1909년에 작성된 오대산사고 조사보고서(궁내부 사무관 무라카미村上)에 의하면 당시 오대산 사고에 1913년까지 보관되었던 주요 문서는 3,610책이라고 합니다. ‘조선왕조실록환수위’에서는 실록 뿐만 아니라 다른 주요문서에 대한 반환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고, 일본의 다른 기관에서 주요문서를 소장하고 있는 사실을 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는 입장에서, 월정사의 권리능력을 국가기관인 서울대가 부정한다면 현재 추진중인 다른 오대산 사고본의 반환운동을 망치는 것 아닙니까?
7. 조선왕조실록의 반환은 국가가 하지 못한 일을 민간운동이 이루어낸 성과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민간운동의 성과를 서울대가 기증 받음으로써 국민적 영광을 퇴색시켰다는 점입니다.
정운찬 서울대 총장의 5월 31일 발언 (문화일보)
“이것은 91년 서울대가 병인양요 당시 반출돼 파리 국립도서관에 보관중이던 외규장각 도서 반환을 공식 요청한 것을 계기로 확산된 문화재 반입운동의 결실”
등은 마치 도쿄대의 선의에 의해 실록을 기증받게 되었고, 우리측의 운동은 아무 의미없는 것인 양, 사실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국가기관이 민간운동을 폄하하고 거꾸로 도쿄대의 선의를 선전하고 있는 셈입니다. 서울대는 이런 비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8. 실록의 소장처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습니다. 특히 도쿄대는 서울대로 기증하게 된 경위에 대해 “1932년 경성제대로 27권을 보관 전환했고, 양국의 학술교류를 위해 전례를 따라 도쿄대가 기증하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습니다. 실록의 약탈자에게 기증받는 것도 억울한데, 소장처까지도 도쿄대의 의견에 따라 정해져야 한다는 것은 국민감정에 맞지 않습니다. 서울대는 조선왕조실록이 기증자의 의사에 따라 서울대에 소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 규장각의 답변서 - 규장각이 환수위에 보낸 답변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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