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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의 인문학 - 진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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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09-23 16:15 조회4,7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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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山)의 인문학 - 진산


ㆍ산에서 근원해 산줄기를 통해 삶터로 이어진
   생명줄의 꼭지


지역주민이라면 누구나 알고 소중히 여겼던 산인데 요즘엔 까마득히 잊힌 산이 있다. 진산(鎭山)이다. 진산은 한 지방을 대표하는 산으로, 오늘날
행정단위로 시·군(읍)마다 하나씩 지정되어 있었다. 지방 고을과 지역 주민의 랜드마크인 셈이다.
조선중기를 기준으로 전국 331개 고을에 255개의 진산이 있었다. 내가 사는 곳에 진산이 있었다면
어느 산인지, 무슨 산인지, 지금 제대로 있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진산은 말 그대로 지키는 산이란 뜻이다. 지역과
삶터를 지키고 보호해주는 산이다. 군사적인
방어 요새고 경제적인 생활 터전이었다. 나라를
지키는 산은 나라의 진산이고 지방을 지키는 산은
지방의 진산이다. 진산에는 지역주민들의 믿음과
신앙이 깃들어 있다. 그래서 소중히 보전되고 섬김을 받았다. 진산은 우리 산의 문화사, 산의 인간화 여정에서 핵심 키워드의 하나다.



대구 연귀산의 거북바위. 대구의 진산이 낮고
미약한 점을 보완한 상징적 조형물이다.




함안의 옛 진산 여향산




함안의 새 진산 비봉산


■ 대동여지도에 330개 고을 진산 모두 표기


전국의 모든 진산은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다 표기되었다. 김정호는 호가 고산자(古山子)인 것만
보아도 산의 DNA를 타고난 사람이 분명한 것 같다. 산의 아들, 산가(山家)인 것이다. 그의 시선으로
제작한 대동여지도는 산천 지도라는 정체성이
뚜렷하다. 한반도의 산줄기, 물줄기 체계를 지도학적으로 완성한 위대한 성과다. 우리 몸의 경락 체계를 한의학적으로 도면화한 것과 같다. 산의 눈으로
대동여지도를 보면 한반도가 큰 나뭇가지로 보인다. 뿌리는 백두산이고 등줄기는 백두대간이다.
줄기마다 가지가 뻗어있다. 13개 정맥이다.
가지마다 다시 잔가지가 나 있고 잔가지 꼭지마다
열매가 달려있다. 그 열매가 330여개의 고을이고
꼭지가 바로 진산이다. 포도송이로 비유해 생각해도 쉽다. 포도 알알이가 고을이라면 그것을 물고 있는 꼭지들이 진산이다. 이것이 김정호가 그린 우리
산줄기와 진산, 그리고 여기에 접속된 삶터의
종합적인 이미지다.


대동여지도에 재현된 산천멘탈리티는 오늘날
환경생태담론에 비춰봐도 시사적이고 의미가 깊다. 산에서 근원해서 산줄기를 통해 사람들의 삶터로
이어지는 생명줄 인식구조다. 거기서 산은 자연과
사람을 이어주는 연결망이요 연결고리다. 산줄기는 나무의 가지처럼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물질에너지가 순환하는 통로다. 진산이라는 꼭지는 열매를
굳건히 지켜주고 실하게 클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힘이다. 이러한 사유에는 전통적인 풍수사상도
뒷받침돼 있다. 산에서 생기가 형성되어 산줄기를
통해서 흐르다가 주산 아래의 명당으로 이어진다는 풍수의 핵심 논리다.


■ ‘산이 삶터 지킨다’는 믿음이 진산의 기원


원래 진산은 중국에서 생겨난 용어다. 중국에는
큰 도읍의 특정 지역에만 진산이 지정되었다. 산의 규모도 크고 기이하며 주거지와 멀리 떨어진 위치에 있었다. 오악인 태산(동악), 화산(서악), 항산(북악), 형산(남악), 숭산(중악)은 나라의 진산이다. 중국의 진산은 한반도에 수용되어 토착화되면서 점차
모습이 달라졌다. 신라에서는 네 곳의 중요한 산을 골라 진(鎭)이라 하고 제사를 지냈다.
고려왕실에서는 송악산, 조선왕실에서는 삼각산을 왕도의 진산으로 삼고 소나무도 가꾸며 훼손되지
않게 관리했다. 조선중후기로 가면서 전국 대부분의 지방 고을마다 하나씩 진산이 지정되었다.
나지막한 언덕도 진산으로 삼았고 주거지와도
가까이 두었다. 전주의 건지산(99m),
경주의 낭산(100m), 청주의 우암산(304m),
인천(부평)의 계양산(395m), 춘천의 봉의산(301m) 등이 진산이다.


왜 한국의 진산은 중국과 차이가 났을까?
우리는 지형적 조건이 중국과 달랐기 때문이다.
어느 고을이나 진산으로 지정할 수 있는 산이 있는 것이다. 중국은 산이 없는 평원 지역도 많다.
산이 삶터를 지켜준다는 지역주민들의 뿌리 깊은
믿음도 지방마다 진산을 지정하는 배경이 되었다.
정치적인 이유도 있다. 진산의 지방화는 조선왕조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경관정치학의 산물이기도 하다. 게다가 주산의
지맥이 삶터까지 연결되어야 한다는 풍수사상도
크게 작용했다. 일본에서는 어땠을까? 진산 관념이 일본까지는 수용되지 않았던 것 같다.
오악도 일본에서는 찾기 어렵다.


■ 진산이 ‘주산’으로 변화…건축까지 영향


진산은 지역과 주민들에게 가장 대표적인 산이
되었다. 소중히 관리해야 할 산지경관이 되었다.
훼손되지 않게 보전하고 가꾸고자 노력을 기울였다. 사람은 산을 만나고 산은 사람을 만나서 관계가
맺어진 것이다. 이처럼 인류와 자연, 그 관계의
문명사에서 진화는 산과 사람 사이에서도 이루어졌다. 한반도는 그 대표적 현장의 한 곳이었다.


그런데 진산을 둘러싸고 산과 사람의 공진화 여정에 중요한 전환점이 일어났다. 진산이 주산으로 진화한 것이다. 조선후기의 일이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사회적으로 유행했던 풍수도 큰 영향을 미쳤다.
주산(主山)이란 말은 진산과 비교할 때 용어의 위상부터 다르다. 주산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주체가 되는 산으로 대내적이고 직접적이다. 상대적으로 진산은 지키는 산으로서 대외적이고 간접적이다. 진산에서 주산으로의 발전이 산과 사람의 공진화라는 구체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진산은 삶터와 실제적으로 연결되었다. 처음에는
삶터와 뚝 떨어져 있는 진산도 여럿 있었다. 울산의 진산인 무리룡산(현 무룡산)이 그렇다. 태화강
너머에 고을 밖으로 10㎞ 거리에 두고 마주해
있었다. 삶터에 연결된 꼭지가 아니었다.
그런 진산은 새로 주산으로 바꾸어 지정됐다.
함안도 그랬다. 옛 진산은 여항산(745m)이었다.
그런데 고을의 주거공간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
새로 고을 관아의 뒷산인 비봉산을 진산으로 삼았다. 상징적 랜드마크인 진산에서 실질적 꼭지인
주산으로 바꾼 것이다. 주민과 진산의 관계가
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으로 진화된 것이다.


더 나아가 진산은 삶터와 긴밀히 접속되었다.
진산의 위치와 규모, 방향과 짜임새에 맞추어
공공건축과 주거공간이 배치, 구성되었다.
서울의 백악(북악)과 경복궁이 그랬고 지방의
진산과 관아가 그랬다. 공간조직의 편성마저
진산과 더불어 체계적이고 통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진산과 지역주민 사이의 진화의 여정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진산과 상응하는
경관이미지의 보완이 일어났다.
진산이 비봉산(飛鳳山)이면 봉황의 알(조산)을
만들었다. 누각의 이름도 봉서루(鳳棲樓)라고 해
봉황이 깃들게 했다. 대롱사(大籠寺)·소롱사(小籠寺)라는 새장(籠)으로 봉황새를 가두려는 비보사찰도 두었다. 진주 이야기다.
전국에 수많은 사례들이 있다.


■ 거북바위·쇠머리대기 놀이 등 흔적 남아


진주 남강의 촉석루 맞은편에는 지금도 대나무숲이 울창하다. 이 숲도 진산인 비봉산과 관련이 있다.
봉황은 대나무열매(죽실)를 먹고 산다고 해서
조성한 것이란다. 지역주민들은 남강변의 대나무를 가꾸며 경제적인 용도로 활용도 하고 풍치림으로도 즐겼다. 전통적인 고을숲이나 마을숲의 대부분은
산과 관련지어 만들어진 조산숲이다. 산과 숲의
경관적인 연결성과 통합성은 한국적 특징으로,
주민들이 생활영역에서 산과 맺었던 공진화적인
관계에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산이 주민들의 삶과
생활 속으로, 의식 속으로 깊숙이 들어온 것이다.


대구에도 특별한 진산이 있었다. 크기가 야트막한
언덕에 불과할뿐더러 위치도 고을의 남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 진산은 지역주민들에게
걱정거리였다. 규모로 보나 위치로 보나 고을 뒤를 받치는 튼실한 꼭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큰 고을을 옮길 수는 없었다.
어떻게 그 고민을 해결했을까? 기발하게도 진산
이름을 연귀산(連龜山)이라고 붙였다. 거북으로
연결시킨다는 뜻이다. 산마루에 거북바위도 조성해 두었다. 16세기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이야기다. 왜 거북일까? 거북은 현무의
상징이다. 동 청룡, 서 백호, 남 주작과 함께
북쪽에 있다고 하여 북 현무라고 부른다.
대구 고을의 북쪽 산줄기를 보완, 강화하는 산 상징물인 것이다. 거북은 또 수신(水神)의 상징이다.
화재를 제압하는 신이다. 그 거북바위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는데 2003년의 대구지하철화재참사를 비롯하여 여러 재화를 겪자 정비한 일도 있었다.
오늘날까지 지속한 진산문화의 여풍이다.


유명한 민속놀이 중에 진산으로 연유된 것도 있다. 영산 쇠머리대기 놀이(중요무형문화재 제25호)가
그것이다. 영축산이 영산(창녕군)의 진산인데
마주보는 작약산과 마치 소 두 마리가 겨루는
형상이란다. 주민들은 두 산 사이에서 살기가
빚어지지나 않을까 늘 염려되었다. 이 고민은
흥겹고 신명나는 놀이로 풀어버렸다. 두 산을
상징하는 나무 소를 만들어 패를 갈라 맞붙고
어르고 맺고 푸는 것이다. 일종의 살풀이 의식이다. 놀면서 주민집단 간에 맺혔던 사회적 응어리도 풀고, 진산으로 빚어진 산살(山殺)도, 걱정거리도 함께
푼다. 이토록 지역주민들이 진산과 주고받은
공진화의 문화사는 슬기롭고도 다양하다.


지금이라도 내가 사는 곳에서 진산이 어디 있는지
찾아 볼 일이다. 산에서 비롯되는 생명의 꼭지를
잠그고 살고 있지나 않은지 점검해 볼 일이다.
멀리 있는 백두산을 어렵사리 찾기보다 이미
백두산의 맥에서 우리 지역, 우리 동네 뒷산까지
이어져 있는 주산을 제대로 알고 보살펴야 하지
않을까. 부모와 가족이 가장 소중하듯 특별할 것
없지만 더불어 있는 앞산 뒷산이 내겐 가장
큰 산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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