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연구논문> 연구논문

연구논문

우리 산(山)의 인문학 – 속리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12-10 15:53 조회4,120회 댓글0건

본문

우리 산(山)의 인문학 – 속리산

ㆍ천 겹 백 겹 산천 속, 풍요로운 ‘공동체적 이상향’

‘장소 세포’(Place cell)라고 있다. 영국의 존 오키프 교수가 발견했는데 그 공로로 올해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생쥐의 뇌에 전극을 연결했더니 특정 방향에 있을 때는 특정 신경 세포가 활성화되고, 다른 장소에 있을 때는 다른 신경 세포가 활성화됐다. 장소 기억은 지도처럼 뇌 속의 장소 세포에 저장되어 반응한다는 것이다. 뇌는 걸어 다니는 내비게이션과 다름이 없다.

동물과 달리 사람이 장소를 인지하고 장소와 관계를 맺는 과정은 훨씬 복잡하고 심오하다. 지리적 위치와 같은 공간적인 감각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 정서적, 나아가 정신적인 관계까지 맺는다. 사람에게 장소는 특정한 이미지 혹은 느낌으로도 저장된다. 그래서 사람은 장소적 동물이며 사람에게 공간은 장소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장소와 소통하는 주체는 공동체적이기도 하다. 한 시대에 사회집단이 꿈꾸는 이상적 장소의 담론이 이상향 또는 유토피아다.

극락과 천당, 정토와 낙원, 낙토와 복지, 승지와 길지까지, 여기에는 사람들만이 지녔던 이상적 장소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그런데 그 좋은 곳을 아무나 쉽게 가지도,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데 딜레마가 있다. 극락이나 천당처럼 이승에 없기도 하고, 낙토나 복지처럼 있긴 있다는데 오리무중으로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속리산 언저리에 있는 이상향인 우복동도 그런 곳이다.

유토피아의 어원은 그리스말로 없는 장소 혹은 좋은 장소란 양면적인 뜻을 지닌다. 세속에는 없는 마음 속의 이상적인 장소다. 서양에서는 에덴동산이, 중국에서는 무릉도원이 그곳일 게다. 우리 땅에 유토피아는 어디쯤 있었을까? 지리산과 속리산이 그 대표적인 장소다. 특히 속리산의 이름처럼 세속을 떠난 산에 우복동이라는 유토피아가 있었으니 우연일까 필연일까. 속리산은 어떤 장소성을 지닌 산이었기에 그랬을까.


속리산 우복동 입구의 동천 새김글. 휘돌이하는 필선에서 느껴지는 힘과 형상미는 용유동 계곡의 몸놀림을 쏙 빼닮았다.


■ 한강•금강•낙동강의 시점 ‘겨레정신 발원지’


속리산은 백두대간의 허리이자 한남금북정맥으로 갈라지는 분기점에 자리한다. 한반도를 인체에 비유하면 속리산은 척추의 허리뼈(요추) 지점에 있다. 속리산에서 비롯한 물은 금강•(남)한강•낙동강 세 줄기로 나뉘어 흘러 삼파수(三波水)라고 했다. 삼파수의 공간이미지를 크게 떠올려보시라. 삼태극 아이콘이다. 그래서 속리산은 겨레정신이 발원하는 공간적 원점 자리다. 삼파수는 옛 명칭이다. 조선중기 김극성의 문집에 “문장대 위의 삼파수”라는 글이 나오고, 조선후기의 <괴산군읍지>에도 “속리산 삼파수”가 등장한다. 삼파수는 황해도 구월산에도 있다고 김정호는 <대동지지>에 기록했다. 속리산의 이러한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으로 말미암아 신라 때부터 중사(中祀)로 나라의 제사를 받았다.

한국의 다른 명산들에 비해 속리산은 봉우리가 많고 수려하기로 유명하다. 전국의 산 국립공원 경관자원에 속리산은 총 35개 봉우리가 지정되어 가장 많은 숫자다. 설악산은 그 다음으로 29개, 지리산은 25개다. 속리산은 봉우리 아홉이 두드러져 구봉산이라는 이름도 가졌다. “석세(石勢)가 높고 크고 중첩하며, 산봉우리가 하늘로 치솟은 것이 마치 만개의 창을 벌여 놓은 것 같다.” 김정호의 찬탄이다. 이중환은 “바위의 형세가 높고 크며 봉우리 끝이 다보록하게 모여 피는 연꽃 같고, 횃불을 벌여 세운 것 같다”고도 했다. 이렇듯 속리산은 경치가 빼어나 소금강산이라고도 불렀다.

속리산의 최고봉 이름이 천왕봉이었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속리산 정상에는 대자재천왕사(大自在天王祠)라는 사당이 있었는데 “산 속에 사는 사람들이 매년 10월에 신을 맞이하여 제사 지낸 후 45일을 머물다가 돌아간다”고 <신증동국여지승람>은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맥이 끊어진 속리산 천왕봉 산신제의 기록이다. 현재 이름은 천황봉으로 되어있지만 조선시대 고지도와 문헌에는 모두 천왕봉으로 표기되어 있다. 천왕봉은 지리산, 무등산, 비슬산, 장수산(황해도 재령), 천왕산(경남 고성)에 주봉으로 있다. 그런데 속리산을 포함하여 여러 산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천황봉으로 둔갑해 버렸다. 대구의 비슬산은 금년 8월에야 원래 이름을 되찾아 천왕봉으로 고시되었다. 속리산도 하루 빨리 천왕봉 이름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항간에 알려졌듯이 천황봉이라는 지명은 모두 일제가 개악한 것만은 아니다. 조선시대에는 장수의 주산, 월출산의 주봉, 광양의 천황봉도 있었다.

 


속리산 우복동 이상향으로 알려진 곳. 지리적으로 오지인 데다가 산수가 수려하고 농경지도 넓어 풍요로운 삶터다.


■ 경관•비옥한 땅…‘우복동’이란 이상향으로

속리산의 지형 경관을 내산과 외산으로 구분한 사실도 흥미롭다. 성해응의 <동국명산기>에 “복천사 동쪽을 내산이라고 하고 법주사 위쪽을 외산이라고 하는데, 내산에는 돌이 많고 외산에는 흙이 많다”고 적었다. 흙이 많다는 것은 농사 지을 수 있는 토양조건이 갖춰졌다는 뜻이다. 흔히 설악산도 내설악, 외설악 하듯이 속리산도 내속리, 외속리라 구분 지을 만하다. 속리산 인근에는 작은 속리산도 생겨났다. 충북 음성에 있는 432m의 소속리산이다. 속리산과 산세가 닮고 산줄기가 이어졌다고 이름 붙여졌다. 진안의 마이산 앞에도 나도산(나도 마이산이란 뜻)이라는 작은 봉우리가 있는데 역시 생김새가 비슷해서 붙은 이름이다. 소속리산이나 나도산처럼 산 이름 지어주고 풀이하는 선조들의 심성이 정겹고 인정스럽다.

속리산은 조선후기 지식인들도 주목했다. 신경준은 나라 12명산의 하나로 포함시켰고 이중환은 국토 등줄기의 8명산에 올렸다. 속리산의 명산 됨을 다른 산과 비교한 유학자들의 견해도 관심을 끈다. 이만부는 “속리산은 청량산의 수려함이 있으면서도 산세를 펼친 것이 그보다 크고, 덕유산의 심오함이 있으면서도 기이함을 드러낸 것이 그보다 낫다(<속리산기>)”고 했다. 보는 견지가 높을뿐더러 고개가 끄떡여지는 말이다. 이중환은 “온 산을 빙 둘러 이상스러운 골짜기와 별다른 구렁이 많아 금강산 다음이다”라고 했다. 속리산이 거느린 빼어난 골짜기 경관을 특별히 지적한 것이다.

“속리산은 기이하고 험준함이 금강산에 미치지 못하고, 웅장하고 심원함은 지리산에 미치지 못하지만, 왜 특별히 명산으로 일컬어지고 중국에까지 알려졌을까?” 박문호의 물음이다. 대답은 이랬다. “한강 남쪽의 모든 산이 다 이 속리산을 종마루(朝宗)로 한다. 신령한 기상을 품고 기르며, 높고 넓고 깊고 두터움은 여러 산이 비교할 바가 아니다.(<유속리산기>)” 이렇듯 조선시대 지식인들이 산을 보는 인문학적 안목은 넓고도 깊었다. 서민들도 속리산에 기대를 걸었다. 십승지 중 하나가 보은 속리산 아래 증항 근처에 있다는 것이다(<정감록>). 환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피란보신의 땅으로 속리산 언저리가 꼽혔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속리산의 지리적 위치와 수려한 경관, 삼재가 들지 않고 비옥한 농경지를 갖춘 삶 터 등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우복동이라는 이상향이 생겨났다.

■ 청학동과 함께 한국 전통적 유토피아의 상징

“속리산 동편에 항아리 같은 산이 있어 예전부터 그 속에 우복동이 있다고 한다네, 산봉우리 시냇물이 천 겹 백 겹 둘러싸서 여민 옷섶 겹친 주름 터진 곳이 없고, 기름진 땅 솟는 샘물 농사 짓기 알맞아서 백 년 가도 늙지 않는 장수의 고장이라네.” 정약용이 지은 ‘우복동가’라는 글귀다. 우복동이 지닌 천혜의 자연경관과 이상적인 농경조건, 그리고 장수지역의 특성이 드러난다. 또 우복동의 장소성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 반영돼 있다.

조선시대에 우복동은 낙토와 복지의 대명사로 여겨져 많은 민중들이 여기서 생활터전을 일구었다. 그런데 속리산 우복동이 정확히 어딘지는 여러 설이 분분했다. 조선후기에 어찌나 우복동에 대한 의견이 많았던지 실학자 이규경은 ‘우복동변증설’, ‘우복동진가변증설’ 등의 글까지 써서 검토했을 정도다. 지금 행정구역으로는 대체로 경북 상주시 화북면 용유리, 장암리, 상오리 권역으로 추정한다. 속리산(1058m), 청화산(984m), 도장산(828m)의 삼각형 꼭짓점으로 둘러싸인 분지다. 용유동천, 우복동천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속리산 우복동은 지리산 청학동과 함께 한국의 전통적인 유토피아를 대표하는 장소였다. “세상 사람들이 일컫는 동천복지로 청학동과 우복동”이라는 이규경의 말로도 확인된다. 두 이상향 모두 산지에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서양의 유토피아가 평지에 도시로 구성되거나 천상을 꿈꾸는 것과 대비된다. 우복동의 장소성은 청학동과 어떻게 다를까? 장소이미지가 다르다. 우복동은 소의 배 속 같은 편안하고 넉넉한 골짜기, 청학동은 푸른 학이 날아 깃든 듯 청아하고 신비로운 골짜기다. 그래서 우복동이 풍요로움이 묻어나는 복지의 생활형 이상향이라면, 청학동은 무릉도원과 같은 승지의 신선경 이상향이다. 지형적으로도 차이가 난다. 우복동은 속리산 바깥 기슭의 분지에 있어 농경지가 넓고 비옥하지만, 청학동은 지리산 깊은 산속에 있어 논밭이 협소하고 척박하다. 그래서 두 이상향의 시대적 배경과 사회적 성격도 다르다. 우복동은 조선후기의 사회공동체적인 이상향 담론이지만, 청학동은 고려후기의 개인은일적인 유토피아 담론이다.

이렇듯 조선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의식지도 속에 속리산은 이름처럼 세속의 난리를 벗어난 유토피아였다. 그렇게 기억되어 저장됐던 장소 세포가 지금 그곳에 가면 어떻게 반응할지 자못 궁금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