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의 인문학 – 주산(主山)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10-14 20:19 조회5,474회 댓글0건본문
산(山)의 인문학 – 주산(主山)
공간디자인의 중심, 주산
ㆍ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 냄새 밴 그 낮은 산이 주산
서양과 동양은 지형도 다르고 역사적으로 산과 사람의 관계도 달랐기 때문에 산에 대한 학문적 전통도 차이가 났다. 서양인에게 산은 자연생태의 산이라면 동양인에게 산은 역사문화의 산이다. 이런 배경에서 발달했던 구미 자연지리학과 동아시아 풍수지리학의 산에 대한 시선과 논리도 크게 다르다. 근대 이후 서구의 학문적 방법론이 밀물처럼 들어오면서 한국의 산에 대한 동식물, 자연자원, 지질지형 등의 연구는 눈부신 성과를 거두었지만 문화, 역사, 인문학 등 전통적인 산에 대한 연구성과는 제대로 계승하지 못하고 사회적인 이해도 정체되어 있는 실정이다. 산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용어나 개념조차 생소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주산’이라는 용어도 그 중 하나다. 한국에서 산과 사람의 어울림으로 빚어낸 공간디자인의 중심에는 늘 주산이 있었다.
주산(主山)은 객산(客山)에 상대되는 말이다. 주인에게는 손님이 있어야 하듯 주산은 객산을 마주해야 한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수평적 시선으로 주산은 터를 펼치고 있는 뒷산이고 객산은 맞은편 너머에 주산과 대응하는 앞산이다. 한양에서 경복궁의 주산은 북악이고 창덕궁과 종묘의 주산은 응봉이다. 객산은 관악산이다. 고을과 마을, 집이나 묘에도 모두 주산이 있다. 또한 주산은 조산(祖山)과 대응되는 말이다. 할아버지가 있기에 내가 존재하듯이, 할아비산(조산)이 있어야 주산이 있다는 것이다. 산을 보는 수직적 시선이다. 한반도의 시조산(祖宗山)은 백두산이고 그 아래에 수도, 고을, 마을 등 모든 공간 단위마다 조산이 있으며 그 줄기 끝에 주산이 있다.
이렇듯 전래의 산에 대한 인식에서 발견되는 중요한 특징은 인간사와 인간관계를 산에 투영시켜 해석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산도 보는 순서가 있다. 먼저 할아버지와 나의 관계처럼 조산과 주산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의 흐름을 본다. 다음으로는 주인과 손님의 관계처럼 주산과 객산을 짝짓고 둘의 관계에 비추어 크기, 거리 등의 비례를 평가한다. 예컨대 주산보다 객산이 높거나 크면 손님이 주인을 넘보니 좋지 않다는 식으로 해석한다. 앞산이 너무 크거나 높으면 삶터에서 일조 조건상 불리하다는 점을 이렇게 은유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왕도의 주산, 한양 경복궁의 북악.
■ 한국 특징 담은 배산임수의 ‘배산’은 주산
배산임수(背山臨水)라는 귀에 익은 말이 있다. 산을 등지고 개울을 끼고 있는 한국의 전통적인 취락입지를 한마디로 표현하는 말이다. 그 등진 산(배산)이 주산이다. 사실 배산임수는 한국적 특징이다. 중국이나 일본만 해도 산이 없어서 평지에 취락이 있거나 산이 있어도 취락은 멀찍이 산과 떨어져서 입지한 경우도 흔하다. 유럽에는 산은 있어도 물이 없거나 물이 있어도 산이 없는 지형도 많다. 산 있으면 물 흐르는 산수의 짝 관계가 동아시아, 특히 한국처럼 자연지형 조건으로 형성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산수’라고 한 단어로 형성된 말이 구미에는 없다. 중국과 한국에서는 산수·산천·강산·산하 등의 일반명사처럼 산과 물은 한 몸으로 조합될 수 있었다. 산이 있으면 물이 그림자처럼 따르는 것이다. 그래서 풍수에서는 산수를 음양, 부부 관계로도 곧잘 비유했다. 주산이 남편이면 하천은 아내인 것이다.
■ 세종 때 왕도 한양의 주산 놓고 9년 논쟁
1457년에 세조가 큰 아들 의경세자(덕종)의 묘를 정할 때 주산이 터의 뒷산인지 아니면 더 뒤에 있는 높고 큰 산인지를 신하들에게 물으면서 조정에서 주산 논쟁이 붙기도 했다. 주산이 가장 중요하니만큼 정확히 어느 산을 가리키는지 알아야 했기 때문이다. 세종대에 조정을 떠들썩하게 하며 9년을 끌었던 한양 왕도의 주산 논쟁도 일대 사건이었다. 한양의 주산은 응봉(236m)이 되어야 하는데 백악(북악, 342m)으로 잘못 정했다는 풍수학관리 최양선의 주장이 발단이었다. 조정의 대신들은 가타부타 들끓었고, 세종은 직접 북악에 올라 현지답사까지 하면서 지형을 상세히 살핀 후 결국 북악이 주산이라는 최종 결판을 내기도 했다. 일찍이 조선초 한양 천도 당시에 하륜의 무악(안산) 주산론도 있었고 야사이지만 무학 대사의 인왕산 주산론도 전한다. 그때 만약 주산이 달리 정해졌더라면 한성의 공간구조는 전면적으로 달라졌을 테고 지금의 서울 모습과는 딴판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주산이 중요한 것은 공간디자인을 결정 짓는 기준점이자 방향축이기 때문이다.
마을의 주산론은 실학자 이중환이 <택리지>(1751)에서 본격적으로 제기했다. 살기 좋은 마을을 선택할 때 어떤 주산이 좋은지를 말한 것이다. 이 논의는 조선시대의 주산 인식을 대표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당시 주거지 선택은 나와 가족뿐만 아니라 자손대대로 이어갈 삶터로서 중요했다. 여기서 지리적 조건은 가장 우선시 되었으며 그 중에서도 먼저 주산을 봤다. “주산의 모양은 수려하고 단정하며 청명하고 아담한 것이 제일 좋다”고 네 가지 조건을 말했다. 미학적인 아름다움(수려), 가시적으로 안정된 경관상(단정), 채광과 토질의 자연조건(청명) 그리고 휴먼스케일의 규모(아담)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주산의 모양이 보기 흉하거나, 기우뚱하여 균형을 이루지 못하거나, 빛도 들지 않고 습하여 어둡거나, 터의 규모에 비해 너무 크거나 작아도 좋지 못하다는 것이다.
고을의 주산, 경북 봉화 금륜봉.
전북 남원시 송내리 마을의 주산. 여자가 가랑이를 벌리고 누워있는 형국이다. 마주한 소좆날 언덕을 가리려 조성한 마을숲 나무 한그루가 남아있다.
■ 주산의 형태에 따라 도시·마을 모습 결정
주산 개념은 풍수사상의 다양한 해석이 보태지면서 점점 더 구체적이고 다채롭게 발전됐다. 풍수에서 주산은 북 현무에 해당하는 산이다. 주산의 형태와 규모에 따라 마주하는 객산(주작)과 좌우의 산(청룡·백호)에 대한 비례가 제대로 갖춰져 있는지도 따졌다. 조산에서 주산까지, 주산에서 삶터에 이르는 주맥의 산줄기가 실한지도 눈여겨보았다. 주산에 소나무를 심어 사계절 늘 푸르게 가꾸었고, 주맥이 약하면 흙으로 돋우었으며, 가릴 것이 있으면 숲으로 가렸고, 보완할 것이 있으면 보탰다. 주산에 대한 다양한 상징과 은유도 생겨났다. 사람·동물·식물 등의 형태로 주산의 형국을 비유했던 것이다. 형국이란 국지적인 마을환경을 총체적으로 상징하는 의미를 지닌다.
전북 남원시 운봉읍 신기리 주민들은 마을 앞 봉우리 이름을 초봉(소꼴)이라 부른다. 마을의 주산이 소가 누워있는 형국이기 때문이다. 전국 어디나 마을 주산이 소 형국이면 구유·소꼴 등을 상징하는 대응경관이 마을숲의 형태로 만들어졌다. 남원시 송동면 송내리의 마을 주산은 여자가 다리를 벌리고 누워 있는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마주보는 앞의 언덕이 길쭉하게 남근 형상을 한 둔덕(주민은 소좆날이라 부른다)이 있어 마을에 문란한 바람이 불어 닥칠 것만 같았다. 주민들은 그 둔덕이 보이지 않게 숲을 조성해 가리고, 마주보는 장소에 비석을 세워 기운을 막았다. 주민들은 풍수 형국이라는 코드의 해석을 통해 주산과 네트워크 관계를 맺었다.
이렇게 우리는 주산을 선택하여 만난 것이다. 만나서 주산과 연애하고 살 섞고 자식 낳아 오순도순 함께 산 것이다. 그 주산은 생활 속의 산이었지 유람할 명산이 아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주산은 이름도 없는 산이다. 이름이 없으니 지도에 오를 리도 만무하다. 주민들에게 산이름을 물어보면 그저 마을 뒷산이라고 한다. 나지막한 삶의 터전이다. 신경림 시인은 낮은 산의 미학을 이렇게 애정 어린 눈으로 읊었다.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며 웃으며 나지막이 엎드려 있고,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 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우러지는 사람 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 냄새 밴 그 낮은 산이 주산이다.
■ 마을의 공유 자산 인식…‘금기’‘설화’ 뿌리
마을 주거지가 뒤로 주산을 등지고 있으면 실제로도 여러 이익이 있다. 경제적으로 산림자원을 활용할 수 있고 농경에도 유리하다. 연료와 건축재뿐만 아니라 물과 먹을거리를 얻기도 쉽다. 자연적으로도 뒷산은 겨울철의 매서운 북서풍을 막아준다. 지면 복사열로 온열효과가 있어 주거공간의 기온이 따뜻하고, 비가 내리면 배수에도 용이하여 토질이 습하지 않다. 산골짜기라면 외침에 의한 전란이나 사회적인 난리를 피하기도 안성맞춤이었다. 그래서 주민들은 마을에서 등질 산이 없으면 숲이라도 만들어 주산을 대신했다. 이런 보배로운 주산은 마을공동체 차원으로 온전히 보전되어야 했다.
경북 예천 용문면에 금당실이라는 마을이 있다. 마을 주산은 오미봉이다. 이 산에 무덤을 쓰면 큰 부자가 된다는 말이 예부터 전해내려 오지만, 개인이 묘를 쓰기만 하면 마을에 가뭄이 들어 모두가 두려워했단다. 사욕에 눈 멀어 주산을 함부로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공동체 금기설화의 일종이다. 이렇듯 주산은 마을의 공유자산이었다. 개인적인 용도로, 혼자 차지하지 못하는 공유지였다. 주민들의 주산에 대한 보전장치는 또 있었다. 산제당(당산)이라는 신앙소를 주산에 둔 것이다. 새해 초 산제당에 모여 제사를 모시면서 주산에 대한 소중함을 집단적으로 일깨운다. 이제 주산의 가치는 주민 전체의 공유지식이 되어 개개인의 의식과 행위까지 상호 규정하게 되었다. 이렇게 우리네 사람과 산 그 관계의 중심에는 주산보다 더 크게 주산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