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山)의 인문학 - 서울 북악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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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 관리자 작성일14-09-29 19:15 조회4,220회 댓글0건본문
서울 북악서 통일의 조강으로
ㆍ백악·송악·마니산의 맥이 만나 통일의 천년
터가 무르녹을 곳
한국은 어디나 산이 있기에 수도 서울이 산으로
둘러싸인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만 다른 나라엔
산이 없는 수도도 흔하다. 베이징과 도쿄도 평원에 자리하여 산은 아득히 멀리 있다. 분명한 사실은
전통적으로 한국의 수도 입지에서 산천이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었다는 점이다.
한국적 정체성인 셈이다. 선조들이 지녔던 수도의
산천에 대한 원형적 사유는 어땠을까? 수도의 결정에서 산천은 어떤 기준으로 선택되고 어떻게 가치가 매겨졌을까? 이 의문을 풀면 서울 산천의 과거와
미래가 한꺼번에 보일 것 같다.
그 첫 열쇠는 고조선 신화에 나타난다. 환웅은
태백산 신단수 아래에 신시를 열었다고 했다.
산과 숲의 도읍이라는 기본 구조가 드러난다.
가야는 또 어땠을까. 김수로왕은 서기 43년에
왕도를 정하러 직접 나섰는데, 사방의 산을 둘러보고 “빼어나고 기이하다”고 말하며 터를 결정했다. 수려한 산이 왕도의 사방에 둘러있는 형세인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신라의 탈해는 토함산에 올라 왕궁
터(반월성)를 보니 ‘초승달같이 둥근 언덕이 있어
오래 살 만한 곳’이라 했다. 상징적 형상으로 산을
해석하고 있다.
903년 후고구려의 궁예도 국도를 옮기려고 철원,
평강에 가서 산수를 보았고, 고려 태조 왕건은
919년에 개성의 송악산 아래로 도읍을 옮기면서
풍수를 고려하고 있다.
태조 이성계는 한양을 수도로 정할 때 산천 조건을 엄정하게 검증했다. 삼각산(북한산·위 사진)을
전국 산의 머리로 삼았고 남산(아래)은 왕궁의
방어적 요충지로 이용했다.
■ 산수·교통·군사 조건까지 고려한 서울
다음은 서울이다. “삼각산, 북악 남쪽의 산형과
수세가 가히 도읍을 세울 만하다.” 산수 형세를
따진 고려의 남경(南京) 설치 당시 평가단들의
견해다.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무학대사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서울의 풍수를 살펴본 후 왕도를 결정
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후보지 주산이었던 계룡산, 무악(안산), 북악과
한강 등의 산천 조건이 엄정하게 검증되었다.
무엇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한양의 풍수조건으로서 삼각산에서 북악으로 이어지는 산줄기 형세와
도성을 이루는 산수 국면, 한양의 교통조건으로서
뱃길의 조운과 육상 도로, 그리고 군사조건으로서
성곽을 축조할 수 있는지 여부 등이 종합적으로
검토되었다. 북악의 입지와 대비하여 계룡산의
지리적 위치는 국토의 남쪽에 치우쳐 있고, 무악(296m)은 도성을 이루는 국면이 좁고 성곽을 축조할 주산으로서 높이가 낮다는 결점이 지적되었다.
■ 조선 때 삼각산, 백두산보다 높이 격상
이후 서울의 산은 조선시대의 영광부터 일제
강점기의 굴욕을 거쳐 현대의 수난까지 산전수전을 고스란히 다 겪었다.
조선시대에 서울의 산은 최고의 영광에 달했다.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서울이 조선의 왕도가 되면서 삼각산(북한산, 837m)은 나라의 으뜸 산이 되었다.
조선후기에 신경준은 나라의 열두 산 중에 삼각산을 첫 번째에 두었다. “삼각산을 산의 머리로 삼은 것은 서울을 높인 것”이라고 했다. 백두산은 두 번째로
쳤다. 삼각산은 신라 때만 하더라도 아무런 대접을 받지 못했던 산이었다. 그 산이 고려시대에 남경이 되는 덕에 명산의 반열에 들더니, 조선조에 와서는 하루아침에 나라의 으뜸 산이 된 것이다.
삼각산은 나라의 산천 제의로서는 가장 격이 높은
중사(中祀)로 올랐음도 <세종실록> 지리지에서 확인된다.
백악(북악산, 342m)은 또 어떤가. 한낱 이름도 없는 산봉우리에 지나지 않던 산이 조선왕조에 와서
국왕의 존엄을 상징하는 산으로 바뀌었다.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은 백악으로 인해 지금의 위치에 자리 잡았고, 백악과 남산의 축선에 맞춰 궁궐이 배치되고 도시구조가 형성됐다.
백악은 조선왕실에서 나무 한그루 돌부리 하나라도 손대면 안 되는 지중하고도 신성한 산이었다.
나라의 작위까지 받았다. 태조 4년(1395) 12월
백악산신을 진국백(鎭國伯)으로 봉하고 국가의
제사를 받들었던 것이다.
인왕산(338m)과 낙산(125m)은 서울을 수호하라는 나라의 명을 받았다. 인왕산의 인왕(仁王)은
금강역사(金剛力士)로도 불리는 불교의 수호신이다.
경주 석굴암의 입구를 지키고 있는 인왕상을 떠올려 보시라. 힘센 근육질의 인왕 이미지는 인왕산의
울퉁불퉁한 바위 경관과 겹쳐 연상된다.
한양을 지키는 인왕의 신산(神山)인 것이다.
낙산(駱山) 지명은 글자대로 낙타 등처럼 생겨서
이름 지어졌다는 설, 조선시대에 타락색(駝酪色)
이라는 우유조달 관청이 있었던 데서 연유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낙가산의 준말일 가능성도 있다.
관음보살이 머무는 산인 것이다.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도 여기에서 유래되었고,
낙가산이라는 이름은 청주 상당구와 강화 석모도에도 있다. 한양의 동서를 받치고 있는 인왕산과
낙산은 조선 왕조의 오른팔 왼팔이 되었다.
서울의 좌청룡 우백호가 되었다. 관리들과 명문세가가 다투어 살고 싶어 하는 명소가 되었다.
남산의 영광을 보자. 높이가 262m에 불과해
나지막한 야산에 지나지 않았던 남산이 역사의
무대에서 두각을 나타낸 즈음은 한양이 남경으로
승격된 고려 문종 21년(1067)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에 남산은 한양의 랜드마크이자 왕궁의
방어적 요충지로 격상했다. 봉수가 설치됐고 병영
시설도 들어섰다.
서울의 중심이기에 정치·사회·경제·문화적으로 막중한 공간이 되었다. 나라의 봉작을 받은 것은 북악과 마찬가지다. 태조 4년에 남산을 목멱대왕으로 국가에서 제사를 받들었던 것이다. 남산은 한성부의
공간구조를 결정하는 데도 큰 영향을 미쳤다.
남산을 기준으로 도성의 성안과 성밖이 갈렸던
것이다.
■ 망국의 수난 개발의 몸살… 산의 기능 상실
나라의 몰락과 역사의 격랑은 서울의 산천에도
어두운 그림자를 덧씌웠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때에는 굴욕과 수난의 산이 되었다. 삼각산에서
백악으로 내려오는 맥줄기는 거대한 조선총독부
건물로 차단되었다. 산의 정기로 살았던 조선 사람들에게 일제의 간교한 공간 정책은 숨통을 틀어막는 것과 다름없었다. 남산 자락에는 일본인들의 주거지가 들어찼다. 해방의 기쁨도 잠시, 한국전쟁으로 온
산천이 피로 물들고 두 동강까지 난 상처는 어찌
더 이상 말하리오. 수도에 집중된 근현대화 과정에서도 개발의 장애물로 여겨졌던 서울의 산은 수난의
연속이었다.
그 결과 지금에 이른 서울의 산은 일부를 제외하곤 산이 아니다. 산이 산이려면 산으로서의 항상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적정한 생태계 시스템이 기능해야 하고, 산줄기도 연결되고 하천도 흘러야 한다.
산도 차지하는 자리가 있고 영역이 필요하다. 거죽만 있는 나라가 나라가 아니듯이 다 파 먹히고 앙상하게 뼈대만 남은 산이 무슨 산인가? 산천도 사람을
감당할 수 있는 수용력이 있다. 1000만 인구의
메트로폴리스로, 1㎢당 1만6000명이 사는 밀도
(런던의 3배, 도쿄의 4배, 뉴욕의 8배)는 서울의
산천에게 지나치게 힘겹다.
서울 산천의 미래는 어떻게 내다볼 수 있을까.
앞으로 최대의 역사적 사건이 될 통일을 600년
지탱해 온 서울의 산천이 그대로 떠맡을 수 있을까.
다시 조선의 개국 세력들이 서울의 산천에서 무엇을 보고 새 왕조를 열 곳으로 결정했는지 되돌아보자. 그들은 한양 도성을 이루는 산의 넓은 국면과 함께 한강의 가치와 가능성을 주목했다. 개성은 산간
분지라 산의 짜임새에서 도성의 국면이 좁고 하천
조건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지역분권 호족체제에서 나아가 중앙집권 국가체제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전국적인 공간 인프라가 확보되어야 했다. 거기서
조선의 신진사대부들은 한강의 가치와 가능성을 보았다. 강은 수자원이자 수상 운송과 교통의 기반
으로, 서울의 한강은 한반도의 중부를 통할하는
유역의 지리적 거점이었기 때문이다.
통일시대의 수도는 북악과 한강으로 이뤄진 현재의 서울보다 큰 규모로 주요 산줄기와 물줄기가 만나는 파주·김포·강화·개풍 일대가 적합하다. 전통 산수이론에서 조강(祖江·할아비강)이라고 부르는 입지다.
■ 남북 산천이 한몸으로 만나는 ‘조강’ 지역
서울의 북악과 한강에 이어 이제는 남과 북이 합쳐 새천년의 앞날을 열 수 있는 산천 아이콘이 요청
된다. 바로 조강(祖江)이다. ‘할아비강’, 이 얼마나 상징적인 이름인가. (조선시대에는 조강이라는 지명을 일반적으로 썼지만 지금 지도나 지명에서 조강이라는 이름은 사라져 버렸다.)
거기엔 위로는 고려의 왕도 개성이 있고, 아래로는 단군의 강화도 마니산이 있다. 민족적 공감대를
마련할 조건이 돼 있는 것이다. 산천의 조건으로
보아도, 여기에선 남북의 주요 산줄기와 물줄기가
한 몸으로 만난다. 산은 서울의 백악을 이룬 한북
정맥 산줄기와 개성의 송악을 이룬 임진북예성남
정맥 산줄기가 이르러 도달하는 곳이다.
강은 남녘의 한강과 북녘의 임진강이 만나고 예성
강도 합류하여 서해로 흘러드는 유역이다.
세 강줄기가 거대한 삼태극의 형상으로 휘돌며
역동하는 생명의 땅이다. 행정적으로 파주(교하),
김포, 강화, 개풍군을 끼고 있는 구역이다.
한반도의 중심 위치에 있을 뿐 아니라 강과 바다로 사통팔달하며 중국 대륙으로 거침없이 진출하는
기지다.
신경준은 <산수고>에서 “하나의 근본이 만 갈래로 나뉜 것이 산이고, 만 갈래가 하나로 모인 것이 물(水)이라고 했다”. 할아비산인 백두산과 거기서 나뉜 국토의 대간과 정맥들이 다시 하나로 만난 곳이 바로 조강이다. 그래서 이제 어느 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한반도 산줄기의 맥이 다다라 조강으로
무르녹았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사람들은 지척에 있어도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하지만, 남북한의 산천은 조강으로 함께 만나 도도하게 흐르고 있다. 동아시아를 넘어 세계의
허브로 도약할 통일의 희망메시지를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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