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우절(穀雨節)에 (강원일보 양 4월 19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3-04-19 13:41 조회687회 댓글0건본문
강원일보 2023년 04월 19일 기고문
곡우절(穀雨節)에
원행스님 오대산 월정사 선덕
조계종 원로의원
지난 11일 강릉에 산불이 나 큰 피해를 보고 말았다. 산림, 민가, 호텔, 펜션, 골프장 등 379㏊가 불탔는데 이는 축구장 530개 수준이라고 한다. 1명이 숨지는 등 20명의 인명피해가 발생했고, 1차 조사 결과 건축물 266동, 150 농가, 79개 숙박시설 등 92개 소상공인 시설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잠정 집계됐다. 전소된 건물만 116채나 된다고 하니 아픔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재민 모든 분께 위로를 전하며 하루빨리 복구가 진행돼 일상을 되찾을 수 있기를 기원한다.
이번 산불이 발생하자 여야를 불문하고 정치인들이 현장에 도착해 피해 상황을 파악하고 복구계획을 마련하는 등 실로 오랜만에 손발을 맞췄다. 재난에 여야가 어디 있겠는가. 당연한 일이다.
다만, 국가의 모든 현안에 대해 이처럼 머리를 맞대고 협업한다면 지금 우리나라는 훨씬 더 좋은 나라가 돼 있을 것이다. 정치라는 것이 원래 태생부터 싸우는 게 일이라지만 우리는 도가 지나치다. 정치가 그렇다 보니 민심도 반으로 쪼개져 선거철마다 심각한 국론 분열이 일어난다. ‘정치도의(政治道義)’나 ‘상생’이라는 말은 이제 찾아보기 힘든 희귀어가 되고 말았다.
“정치만을 위한 정치는 백해무익하다. 진실로 인간을 위한 정치일 때만 국가의 기강이 바로 세워진다”고 일갈하신 오대산 옛 조실 탄허 스님은 일찍이 정치인의 자격과 그들이 갖춰야 할 덕목에 대해 늘 강조하셨다.
흔히 말하는 오피니언 리더들을 만날 때마다 미래에는 우리의 국운이 어떻게 변할지, 그 국운을 잘 진행하기 위해 정치인은 어떤 마음, 어떤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를 직설적으로 강의하셨다.
또 모든 발전은 인화(人和)가 바탕이 돼야 하는데, 좋은 국운을 번영으로 연결하는 데는 정치인의 역량과 그릇이 인화로 이끄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에 달려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탄허 스님이 강조하신 여러 정치론(政治論)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게 ‘다섯 가지 정치 방법’이다. 가장 좋은 정치는 도(道)로써 하는 정치인데, 도란 시공(時空)이 끊어져 욕심이 없는 상태이므로 이 이치를 알아 각 분야에서 도를 실천하면 가장 바람직한 정치가 나온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러한 도를 갖추지 못했다면? 덕(德)이라도 갖춰야 하고, 덕을 잃으면 인(仁)이라도 베풀 줄 알아야 하며, 인을 잃으면 의(義)라도 지켜야 하고, 그 의마저 잃으면 예(禮)라도 차릴 줄 알아야 한다고 하셨다.
지나치게 이상적인 정치론 같지만 실은 매우 현실적이다. 지난 산불 피해 현장에 도착한 정치인들은 이재민들 앞에서 최대한 예를 갖췄다. 망연자실한 이재민들의 아픔에 공감하고 하소연을 경청했다. 그 상황에서 그 누가 유력 정치인이라고 의전 같은 걸 생각하겠는가. 당연히 그럴 수 없다. 예 하나만 갖춰도 민심은 가라앉는 것이다.
오는 20일은 곡우(穀雨)다. 청명과 입하 사이에 있는 24절기의 하나로 이때쯤이면 봄비가 내려 작물에 싹이 트고 못자리를 내는 등 농사가 시작된다. 농촌에서는 곡우에 모든 곡물이 잠에서 깨어 자란다고 보는데 우리 정치도 곡우처럼 구태를 벗고 새로 출발하는 모습을 보면 좋겠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정치는 본래 상생과 홍익(弘益)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다. 누구도 소외되거나 도태되지 않도록 세심히 보듬는 정치를 기대한다. 다시 한번 강릉 산불 이재민 모든 분께 위로를 전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