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허와 원행/ 김종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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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원행스님 작성일18-05-10 03:42 조회2,725회 댓글0건본문
원행과 탄허
10년 전, 제 사무실에 일이십 명이 모여서 원행스님의 불교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출판사 간판 옆에다 아예 ‘자광회’라는 간판을 달았습니다. 원행스님의 법호가 자광입니다. 그리고 제 출판사에서 스님의 책 6권을 냈습니다. 책을 여섯 권 내다보니 스님의 구도과정을 조금 다른 각도로 보게 되었습니다. 제 식으로 본 것이지만, 아마 맞을 겁니다.
첫째 원행(遠行)이란 법명은 탄허스님이 지어주신 겁니다. 화엄경에 나오는 제7지 원행지보살에서 따온 것이랍니다. 원행지는 자성이 없어 공하기에 머무를 수가 없다는 것을 자각하여 쉬지 않고 먼 수행의 길을 가는 보살입니다. 이분의 행장을 짚어보면 아주 딱입니다. 게다가 탄허스님은 10.27 법난과 월정사 분규를 겪은 뒤 또 이런 글귀를 써주셨답니다.
“계간불능유득주(溪澗不能流得住) 경귀대해작파도(竟歸大海作波濤)” (계곡의 물이 어찌 머무르리오, 끝내는 큰 바다로 나아가 파도치리라)
원행이라는 법명과 ‘계곡에 머무를 수 없으리라(溪澗不能流得住)’는 이 글귀는 그대로 원행스님의 구도행에 로드맵이 되어버립니다. ‘언젠가는 큰 바다로 나아가 파도치리라(竟歸大海作波濤)’는 아직 때가 온 것 같지 않으니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만. 어쨌거나 원행스님은 탄허스님과 은사 만화스님이 열반하시자 49재 모시고는 제2의 출가를 결행합니다. 성철스님께 가서 해인사 장경각 장주소임을 맡는데요. 거기서 거의 눕지도 않고 피를 토하며 4분 정근기도를 하시는데 일 년이 지났을 즈음 꿈을 꿉니다. 월정사 법당이 새까맣게 타버리고 숯 더미 속에 ‘법륜전지’라는 탄허체의 하얀 글씨가 보였답니다. 곧바로 바랑 하나 걸머지고 탄허스님이 생전에 절터로 마련해 두신 대전 유성의 학하리로 가십니다. 그때까지 그곳은 허름한 함석집 한 채만 있었는데, 그나마 스님이 가셨을 땐 그마저도 거의 폐가가 되어 있었어요. 비는 오는데, 문짝을 덜렁거리고 탄허스님 영정은 바닥에 떨어져 나뒹굴고, 그 폐허의 땅에 지금의 자광사를 세우신 분이 원행스님입니다. 그야말로 맨손으로 10년에 걸쳐 웅장한 3층 전각을 짓는 장엄한 불사를 하셨습니다. 그 다음엔 동해의 삼화사로 가셨습니다. 삼화사는 1,500년이나 된 고찰로 부지가 거의 3만 평이 넘는 대가람이었답니다. 박정희 정부 때 쌍용에서 헐값으로 강제 매입해버렸기 때문에, 스님이 가셨을 땐 법당을 포함하여 천 평 정도로 축소되어 있었습니다. 원행스님이 삼화사 주지 임명을 받고 들어가자마자 발견한 게 훼손된 철불입니다. 철불이 귀한데, 이 부처님은 한쪽 팔이 떨어져 나가고 하반신은 아예 잘린 상태로 시멘트로 대충 붙여놓은 상태였습니다. 약사전이란 현판을 붙은 원두막만한 공간에 옹색하게 모셨는데, 원행스님은 이런 꼴을 그냥 두고 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일이 두렵지 않은 분이세요. 곧바로 불상 복원 작업을 시작한 거지요. 그런데 시멘트를 벗겨보니 등판에서 명문이 나왔습니다. 고려조에 조성된 노사나불이었던 겁니다. 난리가 났어요. 신문에 대서특필 보도되고 원행스님을 인터뷰하고…. 적광전을 중수하여 철조노사나불을 본존불로 모셨고, 이 철조노사나불은 국가지정보물로 등재되었습니다. 삼화사에서도 그밖의 불사를 어마어마하게 하십니다. 그 다음 원주의 구룡사로 가십니다. 거기서도 불교대학을 개설하고 원주경찰서에 경승실을 만들고 신도들을 기다리기보다 직접 찾아나서서 실천적 불사를 일으키지요. 주지 임기 만료 한 달 전, 문제가 생겼습니다. 스님 출타한 사이 대웅전이 전소된 것입니다. 지금의 원주 구룡사 법당도 원행스님께서 불사를 하신 것입니다. 결국 제2의 출가 후 오대산 월정사로 다시 돌아가기까진 25년이 걸렸습니다. 스님이 움직인 자취를 따라가 보면 월정사에서 합천 해인사, 해인사에서 대전 자광사, 자광사에서 삼척 삼화사, 삼화사에서 원주 구룡사, 그 다음 월정사, 지도에서 이 길을 따라 그려보면 거의 타원형입니다.
원행지가 맞지요? 쉬지 않고 먼 구도의 길을 가시는 분 맞지요?
스님은 월정사로 들어가실 때 지금 주지인 정념스님이 사제인데, 그분께 간곡히 부탁합니다. ‘그냥 쬐그만 방 하나만 내주면 주지스님 가방모지나 하면서 기도정진하겠습니다.’ 그 즈음에 제가 원행스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6권의 책을 냈지요. 처음엔 매우 부끄러워하시면서 원고가 든 유에스비를 세 개나 가져오셨어요. 열어보니 원고가 200자 원고지 만 오천 매 정도가 들어 있었습니다. 편집부에서 난리가 났어요. 그 정도면 책 20권 분량입니다. 그 많은 원고에서 책 한권 분량을 골라 실으라니, 이 작업이 어떠하겠습니까?
잘 아시겠지만, 박근혜 정부 출범 1년이 되던 2013년 11월에는 조계종 승려 1012인이 시국선언을 했지요. ‘대통령 선거에 국가정보원과 군 사이버사령부 등이 조직적으로 동원돼 민의를 왜곡한 사태’를 질책하고 또 이념갈등 남북갈등 복지갈등을 유발하는 행태를 강력히 비판하는 내용인데 그때 시국선언문을 스님이 낭독하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엄청 고생하셨지요. 따지요, 스님이나 신도들로부터 왕따 당한 거지요. 그런데 별로 개의치도 않고 지치지도 않으세요. 작년 광화문광장 5.18기념식에도 가셔서 추모사를 하고, 안중근 의사, 김 구 선생 등, 민간단체에서 여는 행사에 꼭 참석해서 쓴 소릴 아끼지 않으시지요. 이 책 뒤쪽에 그때 하신 축사나 추모사를 수록했습니다. 읽어보면, 이분이 산속에만 계신 스님이 맞나, 하면서 놀랄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런데 탄허스님은 이 분을 어떻게 그리 잘 알아보셨을까요? 저는 작가니까, 작가적 상상력으로, 혹시 원행스님이야말로 탄허스님이 마지막 보루로 숨겨둔 법맥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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