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사자후> 행사법문

행사법문

돌없는밥을짓자(도민일보 양5월16일)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5-05-16 09:03 조회290회 댓글0건

본문

‘돌 없는 밥’을 지을 때

 

원행 대종사    오대산 월정사 선덕

조계종 원로의원

 

 

지난해 12.3 계엄 사태 이후 우리 국민은 모두 법률 전문가가 되었다. 기각과 각하의 차이, 정상적인 계엄과 불법적인 계엄의 기준, 헌법재판소 운영 방식 등등은 물론이고 구속 기간을 날로 하는지 시간으로 하는지, 즉시 상고라는 제도는 또 어떤 것인지 마치 법조인처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뿐인가. 파기자판, 파기환송, 상고기각 같은 난생처음 들어보는 법률용어에도 해박하게 되었으며, 대법원은 어떻게 기일을 잡고, 언제 판결을 내리고, 그 과정에서 피의자 방어권을 위해 얼마의 기간을 줘야 하는지 하는 복잡한 재판 규정에도 전문가가 되었다.

그러더니 기어코 정당 내부의 대선 후보 선출 규정까지 속속들이 꿰게 되었는데, 소승은 이런 사태를 접하며 불현듯 지난 2002년 한일월드컵이 떠올랐다. 당시 우리 언론은 축구 전문지라고 해도 될 만큼 온통 축구 기사를 1면에 내보냈고, 우리 국민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 축구 평론가였다.

압권은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이었다. 당시 우리 선수가 오프사이드를 범했냐, 아니냐가 문제가 됐는데, 다음날 만나는 사람마다 축구 전문가처럼 오프사이드 규칙에 관해 세세히 설명하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러나 그때의 전문가와 지금의 전문가는 천양지차다. 그때 우리 국민이 환호와 감격의 전문가였다면, 지금은 걱정과 불안의 전문가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법률에 대해서는 모르는 게 상책이다. 실제로 대부분 국민은 살아가는 내내 법률에 관해 잘 모른다. 안다면 그건 법적 분쟁에 휘말렸다는 얘기다. 몇 년씩 이어지는 재판은 당사자를 고통 속으로 내몬다. 마지막 상고심에서 승소했다 한들 상처뿐인 영광이다. 재판 한 번 한 끝에 잇몸이 다 허물어졌다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지금 전 국민을 법률 전문가로 만드는 이 시국은 분명 정상이 아니다. 국민은 고통과 불안과 걱정 속에 빠져있다. 이렇게 만든 원인은 일차적으로 정치지도자들에게 있다. 정치를 잘못했기 때문이다.

탄허 스님의 법문을 모은 〈탄허록〉에는 정치지도자의 자격과 역할에 관해 자세히 나와 있다. 스님은 이르기를, 정치지도자는 먼저 신뢰를 받아야 하고, 공정하고 공평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늘 주변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나라의 운명은 지도자의 심성에 달려있으므로 국민을 위한 철학부터 갖춰야 한다고 설파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민생고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라고 했다.

그러지 않고 정치만을 위한 정치, 개인과 소수 세력만을 위한 정치, 욕심을 채우기 위한 정치를 하면 그건 백해무익을 넘어 국가를 나락으로 떨어트리는 지름길이라는 것이다.

우리 정치지도자는 어떠했나. 후자에 가깝다는 게 대부분 국민의 생각일 것이다. 그 결과가 지금 전 국민을 법률 전문가로 만든 이 어수선한 시국이라는 점 역시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어쨌든, 6개월에 걸친 우여곡절 끝에 오는 6월 3일 새 대통령이 선출된다. 국론이 사분오열됐다. 무엇보다 국민 화합이 중요하다. 모든 발전은 인화(人和)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좋은 국운을 번영으로 연결하는 데는 지도자의 역량과 그릇이 인화로 이끄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에 달려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소장 대행의 은인으로 알려진 김장하 선생이 어느 정치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돌 없는 밥을 지어달라.”

따지고 보면 돌 없는 밥을 짓는 건 국민이 해야 할 몫이다. 그건 바로 투표다. 적극적으로 나서서 돌 없는 밥을 지어보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