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주스님 영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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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21-08-01 06:12 조회2,091회 댓글0건본문
오늘 우리는
한국불교의 큰 스승이신 태공당 월주 대종사를
적요의 세계로 보내드려야합니다.
50여 성상을 넘게 보아온 모악산의 산자락은
오늘 왜 이리도 처연하고 적막할 뿐입니까?
출가사 문으로
생사와 별리의 경계는 마땅히 넘어서야 하겠지만
스님을 보내드려야하는 이 비통한 마음,
가눌 길이 없습니다.
월주 대종사께서는
1961년 이곳 금산사 도량에 주지로 부임하셨습니다.
이후 대종사께서는
도량의 중창불사에 온 정성을 다하셨고,
이곳 금산사는 드디어 400여 년 만에
정유재란의 참화를 온전히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60여 년간 대종사께서
손수 어루만지시던 돌덩이와 초목은
지금도 제자리에 그대로 있습니다.
대종사이시여! 대종사는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태공당 월주 대종사는
일평생 우리 종단의 혁신과 발전을 위해 정진하셨던
‘종문(宗門)의 사표(師表)’이십니다.
대종사께서는 젊은 시절부터
종단의 대소 소임을 마다하지 않으셨고,
두 차례에 걸쳐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직을 역임하셨습니다.
매사 공심(公心)을 앞세우며
종단 발전을 위해 헌신하셨던 대종사의 삶은
우리 종단사에 오래도록 기억될 것입니다.
대종사는 이 시대의 진정한 보현보살이셨습니다.
대종사께서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의 삶은 보살도(菩薩道)와
보현행원(普賢行願)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이었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자가 지켜본 대종사의 삶은 실제로 그러하였습니다.
스승의 삶에서 ‘쉼’이라는
시간과 공간은 결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대종사께서는
고령이 걱정되어 건네는 상좌들의 안부 인사조차
달갑게 받지 않으셨습니다.
월주 대종사의 보현행은
‘깨달음의 사회화’ 운동과
‘지구촌 공생회’ 운동으로 대표됩니다.
대종사께서는 항상
이웃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이
곧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말씀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웃의 아픔을 함께하고,
그들에게 실질적 도움을 주기 위해
대종사는 1980년에는 광주로 달려가셨고,
최근에는 멀리
아프리카 지역까지 다녀오시기도 했습니다.
그 어느 누구도
위안부 할머니들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던 시절,
대종사께서는 경기도 광주에 나눔의 집을 건립하여
할머님들을 정성껏 돌봐주셨습니다.
월주 대종사는
곧 ‘보현보살의 화현(化現)’이었음을
저희들은 이제야 깨닫고 있습니다.
대종사께서 남기신 자취가
너무도 크고 무겁게 다가오는 오늘입니다.
이제 남겨진 저희 종도(宗徒)들은
어찌해야 하겠습니까?
이 사회의 아픔과 이 시대의 고통은
이제 누구에게 의지하여 치유해 나가야 하겠습니까?
홍대(鴻大)한 스승의 은혜를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위대한 스승의 자취를 기어코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벌써 사무치게 그리운
존사(尊師)의 존호(尊號)를 다시 불러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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